안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004.11.13 11:14

윤봉원 조회 수:1028 추천:142

안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경남에서 제일 벽지인 거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까지 친구따라 주일이면 교회에 다녔지만 구원에 대한 지식도 확신도 없었습니다.

외가인 거창군 남상면에 가면 신심이 돈독하신 외할머님의 단정한 모습과 교회에서 경건히 기도하시는 모습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긍정적인 느낌을 주었습니다.

진주 사범으로 진학한 후로 주변에 교회가는 학우도 없었고 저도 공부에만 코가 빠졌으니 신심은 멀리 있었습니다.

초임지인 고향 모교 거창고등학교에서 6년간 근무중에 친구들과 주일에 교회 갔으나 구원에 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혼 후 시댁인 진해로 와서 도천초등학교 등 3개 초등학교에서 10년간 근무하며 맏며느리로서 딸을 연년생으로 낳게 되자 시어머님을 둘째딸이 백일이 지나도록 한 번 안아주시지도, 얼굴 한 번 들여다 보시지도 않으면서 온갖 일로 못마땅하게 생각하셨고 지독히 아들을 선호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심한 우울증으로 몸도 마음도 쇠약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에 잠을 못잤습니다.

나 하나 죽는 것은 별일 아니지만 두 딸들의 엄마는 있어야 했으니까요.

잠 못 자는 밤에 의학백과를 펼쳐보니 온갖 병이 제 몸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저의 시어머님을 먼 옛날부터 절에 열심이었고, 제 남편은 고 삼때까지 매년 섣달 그믐이면 절에서 밤을 새게 하셨답니다.

괴로워하는 제 모습에 동료 선생님들이 용한 철학관이 있다며 등을 밀었습니다. 철학관에서 ‘이영자’ 이름으로는 딸 다섯 낳기 전에 아들을 낳을 수 없다며 ‘정민’으로 개명하라기에 따라했고 호적에도 고쳐 썼습니다.

때 맞추어 시어머님은 절에서 삼칠기도를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기에 거역못하고 방과후면 곧장 절로 가서 시어머님을 따라 불공을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도 딸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오직 아들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0년 만기 순환근무제로 거제도로 전근 발령났으나 더 이상 교사로서의 근무의욕이 없는 저에게 주변 사람들의 강한 격려와 권유로 부임지로 가는 중 심한 멀미와 아득히 먼 거리감이 저의 사랑하는 딸 셋을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당일로 사표를 제출하고 딸 셋을 예쁘게 키우겠다고 살림을 맡았지만 대가족 살림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교사외는 제대로 하는 것이 없구나! 아니 교사도 제대로 했는지..”

한 없는 자학과 괴멸감에 시간과 하늘과 땅이 온통 저를 덮어 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모르는 중에 좀 아는 것이 문방구였기에 문구점을 열어 교사 시절의 경험과 열심으로 번창시켰습니다.

바쁜 짬짬이 딸과 아들 사이로 흔들리고 있을 때 신복란집사님이 저에게 믿음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저의 시어머님 생전에는 교회에 갈 수 없다고 하자 새벽기도에 참예하면 된다고 하여 시어머님과 남편 몰래 참예하여 은혜를 받고 1991년 등록하였습니다.

주일 오전예배에 참예하니 마치 힘든 시집살이 하던 딸이 친정에 온 것 같아 슲게 울며 기도했고, 성경말씀이 꿀송이 같다는 표현대로 너무 좋아서 읽다가 쓰고, 쓰다가 익히고, 읽고 또 읽으며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1 주일에 한 번씩 받는 성경 공부문제로 공부하니 갈급하면서 여러가지로 궁금했습니다.

그때 제일진해교회 정재선 집사님의 주선으로 부산고신대학에서 주관하는 평신도 성경통신대락에 2년과정의 공부를 수료하게 되었고, 원망대신 감사와 기쁨으로 시어머님께 순종하니 80평생 절만 아시던 분이 저에게 “예수 믿으면 그렇게 사람이 변하나? 나도 너랑 교회 갈란다.”시며 불편한 몸으로 기쁘게 예배를 드리셨는데 석가탄일에 막내 시동생이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절에 열심히 다니는 큰 시누님이 저와 시어머님께 있는대로 퍼부었습니다.

제 남편이 각자의 종교를 따르라고 했을 때 어머님을 남편과 제 눈치를 보며 갈등스러워하니 “어머님은 교회가지 마십시오”하여 어머님은 다시 염주와 불경을 찾아 잡으시고 얼마간 교회를 쉬셨습니다.

저는 큰 시누님께 “형님은 부처님께 빌고 저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겠습니다.”하며 당당해졌습니다.

잠시 주춤하시던 시어머님은 시동생의 교통사고 문제가 거의 정리되자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님들의 중보기도와 신집사님의 사랑의 수고로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저는 어머님과 함께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IMF 가 오고 우리상점 으뜸고객인 육군대학이 이전하자 매상은 50%이하로 떨어지고 매월 적자 상태라 남편도 저도 점포정리를 원하고 무던히 애도 썼지만 쉽지 않았고, 남편은 저에게 하나님께 지극히 기도드리라면서 자기는 수시로 ‘올마이티시여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 한답디다

하나님의 뜻대로 점포정리가 되고 지금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매일 새벽기도때 받은 은혜로 몸도 마음도 새로워지고 받은 말씀을 묵상할 때 주시는 감동과 성도님들이 사랑의 수고로 섬기는 모습에서 받은 감동을 적어 창원극동 방송에 보내 하나님의 은혜로 방송되면 저와 우리 성도들이 모두 기뻐하며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토요일 어린이 천국잔치때 선교사 이야기를 맡았는데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비젼과 도전과 감동을 줍니다. 또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와 찬양이 어른들에게도 전할 수 있도록 간단하면서 확신을 받게 됩니다.

주일에 찬양대에서 찬양을 하도록 은혜 주시고 저를 붙들고 주의 일을 하게 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단순하게 지내도록 다 정리하여 행복한 나날을 지내도록 새 힘을 주십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의 종이 되어 고민, 고통, 방황에 허덕이던 저에게 넘치는 기쁨과 행복과  참 안식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004년 11월 8일 이정민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11-13 11:1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