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 아버님을 기리며

2005.12.02 22:26

윤봉원 조회 수:1118 추천:124

두 분 아버님을 기리며

나는 1965년 11월에 결혼 하고도 일면 반이나 거창에서 교편 생활을 했다. 1966년 12월에 친정 어머님의 고혈압으로 돌아가신지 두 달 좀 지났으며 첫 아이의 출산 예정이 3월 6일로 임박 했던 2월 말이었다.
“교장 선생님! 일 주일간 연가를 허락해 주십시오.”
“이 선생! 너거 집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나? 가다가 기차에서 아 낳으면 우짤래?”
“기차에서 설마 받아주겠지요.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 네 말이 고맙다. 그만한 각오를 한다면 허락하마. 몸 조심하고 다녀오너라.”
“고맙습니다. 교장 선생님.”
아버님과 친구지간이신 교장 선생님의 배려와 따뜻하심이 많은 용기와 위로가 되었다. 부른 배를 두 손으로 안고 교무실에 오니 선생님들이 모두 안 쓰러워 하셨다. 복부 수술 후유증과 어머님 별세 충격 탓인지 아버님의 병환이 갑자기 악화되어 군청에 근무 하시던 아버님은 병가원을 내셨고, 기동하시기도 힘들어 하셨다. 남편의 요구와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시댁인 진해로 내신 신청을 했었으므로 마음이 무척 조급하였다. 서둘러 아버님을 모시고 서울 큰 병원에 가기 위해 김천행 버스를 탔다. 김천 도착 전에 눈이 많이 쌓여서 모두 버스에서 내렸다. 건너편에 대기중인 버스에 갈아타야 함으로 만삭인 나도, 중병이신 아버님도 있는 힘을 다하여 미끄럽고 위험한 길을 오래 걸었다. 그 때가 후기 대학 입학시험때라 기차는 초만원이었으나 다행히 좌석표와 입석표를 살 수 있었다. 나는 의자 팔걸이에 걸터 않아서 목이 마른 아버님께 배를 깎아드리며 갔다. 화장실을 자주 가셔야 하는 아버님은 사람들 틈을 힘곁게 오가셨다. 오시자마자 또 가셔야 하지만 서울 큰 병원에 가면 낫는다는 희망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잘 참으셨다.
서울 메리놀 병원에 들어서니 환자와 보호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버님은 이틀 후로 예약이 되어 수진 시간만 기다렸다. 진료시에 의사 선생님이 아버님께서 너무 여위셔서 폐병인 것 같다며 흉관내과로 차트를 보냈다. 진찰실에 들어가니 아버님 더러 상의를 벗고 만세 부르듯이 두 팔을 올리라고 했다. 의사 세 분이 필름을 보고 아! 하더니 외래어로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서 필름을 짚어가며 흉부의 그림에 동그라미를 몇 개 그렸다. 간단히 진찰을 끝내고 “평소 담배를 많이 피우십니까? 전에 어디 아픈데가 없었습니까?”하고 물었다. 아버님은 “담배를 많이 피우는 편이고 복부에 동전만한 혹이 있어서 수술을 받았는데 재발해서 세 번째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으니 부작용인지 물을 하루에 약 한 말 정도 마시고 소변은 5분 간격으로 합니다.”라고 하셨다.
“됐습니다. 나가셔서 기다리십시요”하여 나만 남게 되었다.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친정 아버님이예요.”
“폐 암입니다. 3개월 정도 살 것 같습니다. 집 안 정리 하시고 가족들에게도 연락 하십시오.”
“선생님! 우리 아버지 살려 주세요. 저 돈 준비 해왔으니 입원 시켜주세요.” 하면 애원했다.
“큰 마음 잡숫고 내려 가십시오. 시골에서 오신 것 같군요.”
내 사정을 딱하게 생각한 의사 선생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울면서 입원 시켜 달라고 한참을 시정하다가 밖에 나가 세수를 하고 아버님께 가니
“왜 그렇게 오래 있었느냐?”
“예?”
“저.... 상세하게 알아보느라고 늦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많이 잡수시면 곧 회복 되신 답니다.”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니
“대구 동산 병원에 가서 복부 수술한 담당 의사를 만나보자.” 고 하셨다.
거창에 계시는 숙부님께 전화 드리고 실날 같은 희망을 가지고 대구로 갔다. 마침 언니의 시댁 손자가 경북의대 부속병원 인턴 의사로 있기에 그 분을 찾아갔다. 그 분이 직접 차트를 들고 다니며 종합검사를 받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숙부님께 다시 전화 드리고 아버님께는 비밀로 하시도록 부탁 드렸다.
직행 버스는 대구에서 거창까지 오는데 아버님의 소변이 문제였다. 차장에게 부탁해서 몇 번 쉬어가며 소변을 보셨으나 손님들 보기에 민망했고 차장의 독촉에 안절부절 어쩔줄 몰랐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버님께 편한 자리에 앉아 가겠다며 딴 좌석에 앉으니 하염 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집에 도착 하자마자 어머님 영전에 목을 놓아 울었다. 숙보님과 숙모님은 태중의 아이를 생각해야지 이러면 안 된다고 말리셨다. 말 못하는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졌다. 어린 동생 셋은 어떻게 하며 누구에게 맡기고 떠날까?...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님께 아버님의 병환을 말씀 드리니
“진해로 발령 났다.” 하시기에 대성 통곡을 했다.
“교장 선생님! 진해 교육청에 전화 하셔서 거창에서 출산하고 부임 하도록 선처 해 주십시오.” 하고 염치없이 말씀 드렸다. 교장 선생님께서 어렵게 사정 하시어 진해 교육청의 양해를 얻고 집에 오니 신문을 보신 아버님께서 진해로 전근 된 것을 아셨고, 남편이 데리러 오자 함께 가라고 하셨다. 거창에서 아이 낳고 가겠다고 말씀 드렸지만 아버님께서는
“네 어머니도 없는데 내가 산구완을 하겠느냐? 내 몸 낫거든 진해 놀러 갈테니 내 걱정 말고 가거라.”
하시며 겨우 몸을 추스르시고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신 아버님께 “벚꽃 피면 구경 하시러 꼭 오십시오.” 하며 마지막 인사 드리고 숙모님께 아버님의 병 수발과 동생들을 맡기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진해로 왔다. 아이는 예정일보다 2주나 늦게 낳았다. 아이의 삼 칠이 지난 뒤 음력 삼월 삼일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 온다는 날, 어머님 가신지 채 사 개월도 되기 전에 아버님 마저 돌아가셨다. 해마다 삼짇날이 돌아오면 아버님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대구에서 거창까지 왜 택시로 모시지 않았을까? 그만한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까와서도 아니었는데... 그렇게도 생각이 부족했던가?
어머님 상중이라 흰 쉐타에 검은 치마를 입고 한지에 돈을 싸서 버선 밑에 넣어 신고 아버님을 모시고 서울 병원에 가던 스물 여섯의 만삭된 임산부가 이제 쉰 여덟의 중 늙은이가 되었으니 아버님 가신지가 참 오래되었다. 그동안 힘들때마다, 몸과 마음이 아플때마다, 낙심스러운일이 있어도 그 때를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 죽을 힘을 다 하여서라도 내가 낳은 딸들을 내 손으로 키울수 있고, 동생들을 돌볼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에 견디고 참아왔다. 진해에서 십 년간 장기근무로 시외 전근 발령을 받고 가정 형편상 교직을 떠나 문구점을 시작하여 22년 동안 잘 운영하고 있다. 1991년도에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니 모든 일에 감사하고 마음이 항상 기쁘고 평안하다. 인내와 사랑으로 나의 한 평생을 인도하신 주님이 항상 나와 함게 동행하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1995년 3월 20일 둘째 딸이 위암 수술을 받았을때는 “두려워말고 믿기만하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성경 말씀으로 위로와 새 힘을 얻어 기도와 간구로 딸의 건강이 회복 되었다. 1996년 3월 15일 84세에 대장암으로 별세하신 시아버님은 근검절약으로 6남매의 자녀들과, 자부들, 사위들, 손자들, 손녀들에게 본을 보이셨고 큰 며느리가 우리 집에서 제일 고생한다고 위로 해 주셨으며 어린 친정 동생들을 키워 주신 숙모님 숙부님, 멀리 산촌에 계시면서도 물심 양면으로 돌봐주신 백모님께 전화로 문안드리고 감사의 마음과 정성을 글월로써, 세배를 대신 올렸다
86세이신 시어머님께 남은 효도를 다 하려고 마음을 가다듬고 귀여운 외손자들과 외손녀와 함께 진심으로 세배를 드렸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잠언 17장 6절 말씀)
1999년 2월 25일 이 정민.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5-12-02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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