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눈물이 내 다리위에, 내 가슴위에(변규정목사님 간증)

2006.07.28 18:09

김성혜 조회 수:2143 추천:209

저는 현재 한국어린이교육선교회 총무이자 상계동에 위치한 꽃동산교회의 교육 목사로서 올해로 벌써 어린이 사역 21년째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주로 어린이 노래를 작사하고 교사들에게 노래와 율동을 가르치는 일에 제 작은 정성을 드리고 있으며 정말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몇몇 교회를 다니며 어린이 부흥회를 인도하는 사역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살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를 거의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더 가늘고 길이가 짧은 편입니다. 그래서 걸을 때마다 다리를 접니다.

어린 시절 다리를 저는 자신을 바라보며 때로는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셨을까' 하는 생각에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부족할 뿐인 제가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저를 등에 업으시고 새벽기도에 가셔서, 저를 품에 안으시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하나님, 제 다리를 우리 아들에게 주실 수는 없습니까? " 라고 기도하시며 계속 우셨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아직도 제게는 생생합니다.

어머니의 다리라도 주고 싶어하셨던 그 사랑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흘리셨던 어머니의 그 눈물이 저의 다리로, 저의 가슴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만약 어머니께서 저를 포기하셨더라면, 오늘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 자녀들에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라고 간곡히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형편없는 아이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아이를 끝까지 붙들어준다면, 그 아이는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제 곁을 지나가실 때면 어머니께서는 목사님께 저를 위한 축복기도를 반드시 부탁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목사님께서도 저를 보실 때마다 기도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저를 데리고 다니시며 드러내기가 어려울 수도 있으셨을 텐데, 어머니께서는 저를 항상 앞장세우시고 드러내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격려를 많이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느날 주일학교에서 예배 후 2부 순서로 약간의 활동이 요구되는 게임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영문을 모르시는 선생님께 "잠깐 밖에 나갔다 올께요" 고 말씀드리고는, 밖으로 나와 교회 담벼락에 기대어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어른들은 제가 다리가 아프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갈까봐 하나님이 제 다리를 아프게 하셨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하나님,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왜 다같이 주일학교를 다니고 다같이 하나님을 믿는데, 다른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지 않고 저만 다리가 아파야 하지요?"

무너지는 어린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이렇게 위로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울지 마라. 네가 아픈 것은 부모 때문도, 그 누구의 잘못 때문도 아니란다. 네가 장애를 입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렇게 정해진 것이란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어린이들에게 다 한 가지 이상 아픔을 주신단다. 다른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지 않을 지는 몰라도 가정의 아픔이 있거나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아픔을 가지고 있기도 하단다. 어려움, 시련, 눈물, 아픔이 없으면 너희들이 나를 찾겠니? 네가 하나님 곁을 떠날까봐, 그래서 내가 너를 잃을까봐 너에게 아픔을 허락했단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만 참으렴."

저는 이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닫고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연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저의 장애를 놀리는 아이들, 흉내내는 아이들 앞에서 저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곤 했습니다.

제가 천천히 걸으면 천천히 걷는대로, 빨리 걸으면 빨리 걷는대로 저의 걷는 모습을 흉내내기도 했고, 저의 책가방을 빼앗아 서로 던지며 주고받다가 결국 가방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습니다. 가방에서 쏟아진 소지품들을 붙들고 서럽게 울던 기억이 제게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너 같이 다리 아픈 아이를 보면 재수가 없어" 라며 때리고 돌을 던지는 아이들 때문에 하교후 집을 가까운 거리에 두고도 길을 돌아가거나 길가에 모여있는 아이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숨어서 한두 시간씩 흐느껴 울다가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도착한대로, 이유없이 늦는다고 야단치시는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도 내 마음을 몰라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가 되어, 어머니께서 "규정이는 하나님의 종으로 드려져야 한다" 며 신학대에 갈 수 있도록 제가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기를 원하셨으나, "다리가 불편하니 앉아서 작업할 수 있는 직업을 얻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실업계 고교에 보내야 한다" 는 아버지의 주장 앞에 저는 결국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마다 결국 길이 막혔습니다. 취직도 안되고, 대학도 떨어지고, 다리는 불편하고, 소지품은 주민등록증 하나뿐인 저를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한없이 비참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어머니께서는 " 하나님께서 너를 기다리신다" 라고 하시며 손을 붙잡고 간곡히 격려해주셨습니다.

총신대학교 시험날, 어머니께서는 제가 목사님 댁에서 기도를 받고 가게 하셨으며 저의 시험시간 동안에는 교회에서 제 시간표를 붙들고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시험 전 날에는 저를 산으로 데려가셔서 옆에서 자라하시고 밤새 하나님께 저의 수험번호를 어찌나 부르짖으셨던지, 옆에서 자면서도 그 수험번호를 잊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눈물을 받으시고 저의 진학과 주의 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3년전 7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저는 거의 매일 어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매일 손을 얹고 기도해드리던 일, 집회 차 먼 장소에 나갔을 때는 공중전화를 부여잡고서라도 울며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던 일, 어머니께서 특별히 더욱 괴롭다 하시면 제 집에서라도 자리에서 편히 자지 않고 입던 옷 그대로 거실 벽에 기대어 흐느끼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어머니께서 소천하시기 전 어느날 저는 강변도로를 따라 어머니께 드라이브를 시켜드렸습니다. 창문을 열어드리고 어머니께 "베드로를 향해 물위를 걸어오셨던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살려달라고 기도하세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는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찬송가 376장)"라는 찬송을 부르시고 우시며 "나는 가짜로 살아왔나 보다.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럽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이렇게 괴로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라고 말씀하실 뿐이셨습니다.

드라이브 후 어머님 댁에 돌아와 침대에 눕혀드리니 어머니께서는 고통 속에서도 애써 웃으시며 "규정아, 좋은 목사님이 되라" 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뒤를 돌아서 나서는데, 어머니께서는 있는 힘을 다해 저에게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너 넘어질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해라. 네 다리 쳐다보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라. 넘어질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라. 넘어져 손을 다칠 때 주님 손의 못박히심을 생각해라. 넘어져 다리를 다칠 때 주님 다리의 못박히심을 생각해라. 네가 쓰러진 자리에 주님이 먼저 쓰러지셨다. 네가 넘어진 자리에 주님이 먼저 넘어지셨다. 내가 너를 위해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종이 되도록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시고 반드시 이루실 것을 나는 믿는다."

어머니께서는 그로부터 몇일이 지난 그 해 가을 어느날 새벽 3시경에 돌아가셨습니다. 임종 전 말씀도 못하시고 겨우 숨만 내쉬고 계신 어머니 앞에서 저는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았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아프시고 고통스러우셨습니까? 이제는 고통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시절 아이들에게 매맞고 들어와 잠들 때면 밤새도록 저의 다리를 주물러주시며 우셨던 어머니 모습을 이불 너머로 이따금씩 뵙곤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신 것처럼 저도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저를 위해 부르짖으시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를 기억하며 어린이 사역에 변함없이 헌신하므로 끝까지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내 다리위에, 내 가슴위에

저는 현재 한국어린이교육선교회 총무이자 상계동에 위치한 꽃동산교회의 교육 목사로서 올해로 벌써 어린이 사역 21년째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주로 어린이 노래를 작사하고 교사들에게 노래와 율동을 가르치는 일에 제 작은 정성을 드리고 있으며 정말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몇몇 교회를 다니며 어린이 부흥회를 인도하는 사역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살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를 거의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더 가늘고 길이가 짧은 편입니다. 그래서 걸을 때마다 다리를 접니다.

어린 시절 다리를 저는 자신을 바라보며 때로는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셨을까' 하는 생각에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부족할 뿐인 제가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저를 등에 업으시고 새벽기도에 가셔서, 저를 품에 안으시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하나님, 제 다리를 우리 아들에게 주실 수는 없습니까? " 라고 기도하시며 계속 우셨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아직도 제게는 생생합니다.

어머니의 다리라도 주고 싶어하셨던 그 사랑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흘리셨던 어머니의 그 눈물이 저의 다리로, 저의 가슴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만약 어머니께서 저를 포기하셨더라면, 오늘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 자녀들에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라고 간곡히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형편없는 아이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아이를 끝까지 붙들어준다면, 그 아이는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제 곁을 지나가실 때면 어머니께서는 목사님께 저를 위한 축복기도를 반드시 부탁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목사님께서도 저를 보실 때마다 기도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저를 데리고 다니시며 드러내기가 어려울 수도 있으셨을 텐데, 어머니께서는 저를 항상 앞장세우시고 드러내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격려를 많이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느날 주일학교에서 예배 후 2부 순서로 약간의 활동이 요구되는 게임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영문을 모르시는 선생님께 "잠깐 밖에 나갔다 올께요" 고 말씀드리고는, 밖으로 나와 교회 담벼락에 기대어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어른들은 제가 다리가 아프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갈까봐 하나님이 제 다리를 아프게 하셨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하나님,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왜 다같이 주일학교를 다니고 다같이 하나님을 믿는데, 다른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지 않고 저만 다리가 아파야 하지요?"

무너지는 어린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이렇게 위로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울지 마라. 네가 아픈 것은 부모 때문도, 그 누구의 잘못 때문도 아니란다. 네가 장애를 입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렇게 정해진 것이란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어린이들에게 다 한 가지 이상 아픔을 주신단다. 다른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지 않을 지는 몰라도 가정의 아픔이 있거나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아픔을 가지고 있기도 하단다. 어려움, 시련, 눈물, 아픔이 없으면 너희들이 나를 찾겠니? 네가 하나님 곁을 떠날까봐, 그래서 내가 너를 잃을까봐 너에게 아픔을 허락했단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만 참으렴."

저는 이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닫고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연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저의 장애를 놀리는 아이들, 흉내내는 아이들 앞에서 저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곤 했습니다.

제가 천천히 걸으면 천천히 걷는대로, 빨리 걸으면 빨리 걷는대로 저의 걷는 모습을 흉내내기도 했고, 저의 책가방을 빼앗아 서로 던지며 주고받다가 결국 가방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습니다. 가방에서 쏟아진 소지품들을 붙들고 서럽게 울던 기억이 제게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너 같이 다리 아픈 아이를 보면 재수가 없어" 라며 때리고 돌을 던지는 아이들 때문에 하교후 집을 가까운 거리에 두고도 길을 돌아가거나 길가에 모여있는 아이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숨어서 한두 시간씩 흐느껴 울다가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도착한대로, 이유없이 늦는다고 야단치시는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도 내 마음을 몰라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가 되어, 어머니께서 "규정이는 하나님의 종으로 드려져야 한다" 며 신학대에 갈 수 있도록 제가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기를 원하셨으나, "다리가 불편하니 앉아서 작업할 수 있는 직업을 얻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실업계 고교에 보내야 한다" 는 아버지의 주장 앞에 저는 결국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마다 결국 길이 막혔습니다. 취직도 안되고, 대학도 떨어지고, 다리는 불편하고, 소지품은 주민등록증 하나뿐인 저를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한없이 비참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어머니께서는 " 하나님께서 너를 기다리신다" 라고 하시며 손을 붙잡고 간곡히 격려해주셨습니다.

총신대학교 시험날, 어머니께서는 제가 목사님 댁에서 기도를 받고 가게 하셨으며 저의 시험시간 동안에는 교회에서 제 시간표를 붙들고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시험 전 날에는 저를 산으로 데려가셔서 옆에서 자라하시고 밤새 하나님께 저의 수험번호를 어찌나 부르짖으셨던지, 옆에서 자면서도 그 수험번호를 잊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눈물을 받으시고 저의 진학과 주의 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3년전 7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저는 거의 매일 어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매일 손을 얹고 기도해드리던 일, 집회 차 먼 장소에 나갔을 때는 공중전화를 부여잡고서라도 울며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던 일, 어머니께서 특별히 더욱 괴롭다 하시면 제 집에서라도 자리에서 편히 자지 않고 입던 옷 그대로 거실 벽에 기대어 흐느끼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어머니께서 소천하시기 전 어느날 저는 강변도로를 따라 어머니께 드라이브를 시켜드렸습니다. 창문을 열어드리고 어머니께 "베드로를 향해 물위를 걸어오셨던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살려달라고 기도하세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는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찬송가 376장)"라는 찬송을 부르시고 우시며 "나는 가짜로 살아왔나 보다.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럽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이렇게 괴로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라고 말씀하실 뿐이셨습니다.

드라이브 후 어머님 댁에 돌아와 침대에 눕혀드리니 어머니께서는 고통 속에서도 애써 웃으시며 "규정아, 좋은 목사님이 되라" 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뒤를 돌아서 나서는데, 어머니께서는 있는 힘을 다해 저에게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너 넘어질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해라. 네 다리 쳐다보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라. 넘어질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라. 넘어져 손을 다칠 때 주님 손의 못박히심을 생각해라. 넘어져 다리를 다칠 때 주님 다리의 못박히심을 생각해라. 네가 쓰러진 자리에 주님이 먼저 쓰러지셨다. 네가 넘어진 자리에 주님이 먼저 넘어지셨다. 내가 너를 위해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종이 되도록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시고 반드시 이루실 것을 나는 믿는다."

어머니께서는 그로부터 몇일이 지난 그 해 가을 어느날 새벽 3시경에 돌아가셨습니다. 임종 전 말씀도 못하시고 겨우 숨만 내쉬고 계신 어머니 앞에서 저는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았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아프시고 고통스러우셨습니까? 이제는 고통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시절 아이들에게 매맞고 들어와 잠들 때면 밤새도록 저의 다리를 주물러주시며 우셨던 어머니 모습을 이불 너머로 이따금씩 뵙곤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신 것처럼 저도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저를 위해 부르짖으시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를 기억하며 어린이 사역에 변함없이 헌신하므로 끝까지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내 다리위에, 내 가슴위에

저는 현재 한국어린이교육선교회 총무이자 상계동에 위치한 꽃동산교회의 교육 목사로서 올해로 벌써 어린이 사역 21년째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주로 어린이 노래를 작사하고 교사들에게 노래와 율동을 가르치는 일에 제 작은 정성을 드리고 있으며 정말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몇몇 교회를 다니며 어린이 부흥회를 인도하는 사역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살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를 거의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더 가늘고 길이가 짧은 편입니다. 그래서 걸을 때마다 다리를 접니다.

어린 시절 다리를 저는 자신을 바라보며 때로는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셨을까' 하는 생각에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부족할 뿐인 제가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저를 등에 업으시고 새벽기도에 가셔서, 저를 품에 안으시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하나님, 제 다리를 우리 아들에게 주실 수는 없습니까? " 라고 기도하시며 계속 우셨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아직도 제게는 생생합니다.

어머니의 다리라도 주고 싶어하셨던 그 사랑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흘리셨던 어머니의 그 눈물이 저의 다리로, 저의 가슴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만약 어머니께서 저를 포기하셨더라면, 오늘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 자녀들에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라고 간곡히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형편없는 아이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아이를 끝까지 붙들어준다면, 그 아이는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제 곁을 지나가실 때면 어머니께서는 목사님께 저를 위한 축복기도를 반드시 부탁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목사님께서도 저를 보실 때마다 기도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저를 데리고 다니시며 드러내기가 어려울 수도 있으셨을 텐데, 어머니께서는 저를 항상 앞장세우시고 드러내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격려를 많이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느날 주일학교에서 예배 후 2부 순서로 약간의 활동이 요구되는 게임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영문을 모르시는 선생님께 "잠깐 밖에 나갔다 올께요" 고 말씀드리고는, 밖으로 나와 교회 담벼락에 기대어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어른들은 제가 다리가 아프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갈까봐 하나님이 제 다리를 아프게 하셨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하나님,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왜 다같이 주일학교를 다니고 다같이 하나님을 믿는데, 다른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지 않고 저만 다리가 아파야 하지요?"

무너지는 어린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이렇게 위로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울지 마라. 네가 아픈 것은 부모 때문도, 그 누구의 잘못 때문도 아니란다. 네가 장애를 입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렇게 정해진 것이란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어린이들에게 다 한 가지 이상 아픔을 주신단다. 다른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지 않을 지는 몰라도 가정의 아픔이 있거나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아픔을 가지고 있기도 하단다. 어려움, 시련, 눈물, 아픔이 없으면 너희들이 나를 찾겠니? 네가 하나님 곁을 떠날까봐, 그래서 내가 너를 잃을까봐 너에게 아픔을 허락했단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만 참으렴."

저는 이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닫고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연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저의 장애를 놀리는 아이들, 흉내내는 아이들 앞에서 저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곤 했습니다.

제가 천천히 걸으면 천천히 걷는대로, 빨리 걸으면 빨리 걷는대로 저의 걷는 모습을 흉내내기도 했고, 저의 책가방을 빼앗아 서로 던지며 주고받다가 결국 가방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습니다. 가방에서 쏟아진 소지품들을 붙들고 서럽게 울던 기억이 제게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너 같이 다리 아픈 아이를 보면 재수가 없어" 라며 때리고 돌을 던지는 아이들 때문에 하교후 집을 가까운 거리에 두고도 길을 돌아가거나 길가에 모여있는 아이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숨어서 한두 시간씩 흐느껴 울다가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도착한대로, 이유없이 늦는다고 야단치시는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도 내 마음을 몰라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가 되어, 어머니께서 "규정이는 하나님의 종으로 드려져야 한다" 며 신학대에 갈 수 있도록 제가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기를 원하셨으나, "다리가 불편하니 앉아서 작업할 수 있는 직업을 얻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실업계 고교에 보내야 한다" 는 아버지의 주장 앞에 저는 결국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마다 결국 길이 막혔습니다. 취직도 안되고, 대학도 떨어지고, 다리는 불편하고, 소지품은 주민등록증 하나뿐인 저를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한없이 비참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어머니께서는 " 하나님께서 너를 기다리신다" 라고 하시며 손을 붙잡고 간곡히 격려해주셨습니다.

총신대학교 시험날, 어머니께서는 제가 목사님 댁에서 기도를 받고 가게 하셨으며 저의 시험시간 동안에는 교회에서 제 시간표를 붙들고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시험 전 날에는 저를 산으로 데려가셔서 옆에서 자라하시고 밤새 하나님께 저의 수험번호를 어찌나 부르짖으셨던지, 옆에서 자면서도 그 수험번호를 잊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눈물을 받으시고 저의 진학과 주의 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3년전 7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저는 거의 매일 어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매일 손을 얹고 기도해드리던 일, 집회 차 먼 장소에 나갔을 때는 공중전화를 부여잡고서라도 울며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던 일, 어머니께서 특별히 더욱 괴롭다 하시면 제 집에서라도 자리에서 편히 자지 않고 입던 옷 그대로 거실 벽에 기대어 흐느끼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어머니께서 소천하시기 전 어느날 저는 강변도로를 따라 어머니께 드라이브를 시켜드렸습니다. 창문을 열어드리고 어머니께 "베드로를 향해 물위를 걸어오셨던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살려달라고 기도하세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는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찬송가 376장)"라는 찬송을 부르시고 우시며 "나는 가짜로 살아왔나 보다.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럽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이렇게 괴로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라고 말씀하실 뿐이셨습니다.

드라이브 후 어머님 댁에 돌아와 침대에 눕혀드리니 어머니께서는 고통 속에서도 애써 웃으시며 "규정아, 좋은 목사님이 되라" 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뒤를 돌아서 나서는데, 어머니께서는 있는 힘을 다해 저에게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너 넘어질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해라. 네 다리 쳐다보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라. 넘어질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라. 넘어져 손을 다칠 때 주님 손의 못박히심을 생각해라. 넘어져 다리를 다칠 때 주님 다리의 못박히심을 생각해라. 네가 쓰러진 자리에 주님이 먼저 쓰러지셨다. 네가 넘어진 자리에 주님이 먼저 넘어지셨다. 내가 너를 위해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종이 되도록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시고 반드시 이루실 것을 나는 믿는다."

어머니께서는 그로부터 몇일이 지난 그 해 가을 어느날 새벽 3시경에 돌아가셨습니다. 임종 전 말씀도 못하시고 겨우 숨만 내쉬고 계신 어머니 앞에서 저는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았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아프시고 고통스러우셨습니까? 이제는 고통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시절 아이들에게 매맞고 들어와 잠들 때면 밤새도록 저의 다리를 주물러주시며 우셨던 어머니 모습을 이불 너머로 이따금씩 뵙곤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신 것처럼 저도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저를 위해 부르짖으시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를 기억하며 어린이 사역에 변함없이 헌신하므로 끝까지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내 다리위에, 내 가슴위에

저는 현재 한국어린이교육선교회 총무이자 상계동에 위치한 꽃동산교회의 교육 목사로서 올해로 벌써 어린이 사역 21년째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주로 어린이 노래를 작사하고 교사들에게 노래와 율동을 가르치는 일에 제 작은 정성을 드리고 있으며 정말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몇몇 교회를 다니며 어린이 부흥회를 인도하는 사역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살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를 거의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더 가늘고 길이가 짧은 편입니다. 그래서 걸을 때마다 다리를 접니다.

어린 시절 다리를 저는 자신을 바라보며 때로는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셨을까' 하는 생각에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부족할 뿐인 제가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저를 등에 업으시고 새벽기도에 가셔서, 저를 품에 안으시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하나님, 제 다리를 우리 아들에게 주실 수는 없습니까? " 라고 기도하시며 계속 우셨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아직도 제게는 생생합니다.

어머니의 다리라도 주고 싶어하셨던 그 사랑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흘리셨던 어머니의 그 눈물이 저의 다리로, 저의 가슴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만약 어머니께서 저를 포기하셨더라면, 오늘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 자녀들에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라고 간곡히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형편없는 아이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아이를 끝까지 붙들어준다면, 그 아이는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제 곁을 지나가실 때면 어머니께서는 목사님께 저를 위한 축복기도를 반드시 부탁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목사님께서도 저를 보실 때마다 기도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저를 데리고 다니시며 드러내기가 어려울 수도 있으셨을 텐데, 어머니께서는 저를 항상 앞장세우시고 드러내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격려를 많이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느날 주일학교에서 예배 후 2부 순서로 약간의 활동이 요구되는 게임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영문을 모르시는 선생님께 "잠깐 밖에 나갔다 올께요" 고 말씀드리고는, 밖으로 나와 교회 담벼락에 기대어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어른들은 제가 다리가 아프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갈까봐 하나님이 제 다리를 아프게 하셨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하나님,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왜 다같이 주일학교를 다니고 다같이 하나님을 믿는데, 다른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지 않고 저만 다리가 아파야 하지요?"

무너지는 어린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이렇게 위로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울지 마라. 네가 아픈 것은 부모 때문도, 그 누구의 잘못 때문도 아니란다. 네가 장애를 입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렇게 정해진 것이란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어린이들에게 다 한 가지 이상 아픔을 주신단다. 다른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지 않을 지는 몰라도 가정의 아픔이 있거나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아픔을 가지고 있기도 하단다. 어려움, 시련, 눈물, 아픔이 없으면 너희들이 나를 찾겠니? 네가 하나님 곁을 떠날까봐, 그래서 내가 너를 잃을까봐 너에게 아픔을 허락했단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만 참으렴."

저는 이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닫고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연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저의 장애를 놀리는 아이들, 흉내내는 아이들 앞에서 저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곤 했습니다.

제가 천천히 걸으면 천천히 걷는대로, 빨리 걸으면 빨리 걷는대로 저의 걷는 모습을 흉내내기도 했고, 저의 책가방을 빼앗아 서로 던지며 주고받다가 결국 가방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습니다. 가방에서 쏟아진 소지품들을 붙들고 서럽게 울던 기억이 제게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너 같이 다리 아픈 아이를 보면 재수가 없어" 라며 때리고 돌을 던지는 아이들 때문에 하교후 집을 가까운 거리에 두고도 길을 돌아가거나 길가에 모여있는 아이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숨어서 한두 시간씩 흐느껴 울다가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도착한대로, 이유없이 늦는다고 야단치시는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도 내 마음을 몰라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가 되어, 어머니께서 "규정이는 하나님의 종으로 드려져야 한다" 며 신학대에 갈 수 있도록 제가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기를 원하셨으나, "다리가 불편하니 앉아서 작업할 수 있는 직업을 얻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실업계 고교에 보내야 한다" 는 아버지의 주장 앞에 저는 결국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마다 결국 길이 막혔습니다. 취직도 안되고, 대학도 떨어지고, 다리는 불편하고, 소지품은 주민등록증 하나뿐인 저를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한없이 비참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어머니께서는 " 하나님께서 너를 기다리신다" 라고 하시며 손을 붙잡고 간곡히 격려해주셨습니다.

총신대학교 시험날, 어머니께서는 제가 목사님 댁에서 기도를 받고 가게 하셨으며 저의 시험시간 동안에는 교회에서 제 시간표를 붙들고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시험 전 날에는 저를 산으로 데려가셔서 옆에서 자라하시고 밤새 하나님께 저의 수험번호를 어찌나 부르짖으셨던지, 옆에서 자면서도 그 수험번호를 잊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눈물을 받으시고 저의 진학과 주의 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3년전 7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저는 거의 매일 어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매일 손을 얹고 기도해드리던 일, 집회 차 먼 장소에 나갔을 때는 공중전화를 부여잡고서라도 울며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던 일, 어머니께서 특별히 더욱 괴롭다 하시면 제 집에서라도 자리에서 편히 자지 않고 입던 옷 그대로 거실 벽에 기대어 흐느끼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어머니께서 소천하시기 전 어느날 저는 강변도로를 따라 어머니께 드라이브를 시켜드렸습니다. 창문을 열어드리고 어머니께 "베드로를 향해 물위를 걸어오셨던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살려달라고 기도하세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는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찬송가 376장)"라는 찬송을 부르시고 우시며 "나는 가짜로 살아왔나 보다.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럽다. 몸이 조금만 아파도 이렇게 괴로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라고 말씀하실 뿐이셨습니다.

드라이브 후 어머님 댁에 돌아와 침대에 눕혀드리니 어머니께서는 고통 속에서도 애써 웃으시며 "규정아, 좋은 목사님이 되라" 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뒤를 돌아서 나서는데, 어머니께서는 있는 힘을 다해 저에게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너 넘어질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해라. 네 다리 쳐다보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라. 넘어질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라. 넘어져 손을 다칠 때 주님 손의 못박히심을 생각해라. 넘어져 다리를 다칠 때 주님 다리의 못박히심을 생각해라. 네가 쓰러진 자리에 주님이 먼저 쓰러지셨다. 네가 넘어진 자리에 주님이 먼저 넘어지셨다. 내가 너를 위해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종이 되도록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시고 반드시 이루실 것을 나는 믿는다."

어머니께서는 그로부터 몇일이 지난 그 해 가을 어느날 새벽 3시경에 돌아가셨습니다. 임종 전 말씀도 못하시고 겨우 숨만 내쉬고 계신 어머니 앞에서 저는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았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아프시고 고통스러우셨습니까? 이제는 고통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시절 아이들에게 매맞고 들어와 잠들 때면 밤새도록 저의 다리를 주물러주시며 우셨던 어머니 모습을 이불 너머로 이따금씩 뵙곤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신 것처럼 저도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저를 위해 부르짖으시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를 기억하며 어린이 사역에 변함없이 헌신하므로 끝까지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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