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國手’ 프로 바둑기사 윤준상 6단

2007.04.29 21:19

윤봉원 조회 수:2277 추천:186


"어렸을 때 매일 300원씩 달라고 졸라 팽이를 사더라고요. 자기보다 몇 살 위인 애들한테 지니까 이길 때까지 사서 도전한 거예요. 하루는 잘 때 방에 들어갔더니 팽이에 줄을 감는 잠꼬대까지 하더군요."(어머니 한혜숙씨)

"프로 기사들끼리 축구를 할 때가 있어요. 보통 상대 선수가 저 멀리 앞서 나가면 다들 조금 뛰다 포기하는데 준상이는 상대를 잡을 때까지 죽어라 뛰어 따라잡아요. 포지션도 공격수를 고집하지요."(최철한 9단)


만 19세의 나이로 바둑의 최고수라는 국수(國手)에 오른 윤준상 6단.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에 항상 따라오는 두 단어는 '고집'과 '승부욕'이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타고난 승부사적 기질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고집' '승부욕'…. 이것이 과연 재능, 아니 지능과 관계가 있을까.


그러나 이 기질이야말로 이창호 9단에 이어 사상 두 번째 10대 국수가 된 윤 군의 최고 자산이다. 잘 쓰면 약, 잘 못 쓰면 독이 되는 양날의 검이지만 윤 군은 이를 긍정적으로 발휘한 케이스다.


본보가 소개해온 '신(新)천재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무언가에 미친다'는 것이다. 발레가 됐든, 수영이 됐든, 과학이 됐든…. 다만 '미치는' 동기는 다를 수 있다. 마냥 좋아서 그럴 수도 있고, 탁월한 안목을 지닌 지도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일 수 도 있고…. 윤 군의 경우 삶을 끌어가는 동인(動因)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고집과 승부욕이다.


그렇다면 다중지능(MI)이론으로 본 윤 군의 적성은 어떤 것일까. 검사 결과는 논리·수학 지능과 공간 지능이 뛰어난 것. 논리·수학 지능 점수는 73.05로 전문가 기준 점수인 52.48점을 무려 20점이나 상회했다. 공간 지능 점수 71.31도 전문가 기준 점수(53.06)를 월등히 앞선다. 바둑 기사로서 갖춰야 할 수읽기, 판세 분석 등에 적합한 두뇌를 갖춘 셈이다.


윤 군이 바둑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윤태은(50)씨는 아들이 축구나 바둑 중 하나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네 바둑학원에 보냈는데 윤 군은 3일 만에 손을 털었다. 강한 상대를 만나 대국에서 지자 더 다니기가 싫었던 것. 어머니 한 씨(48)는 "더 배우면 이길 수 있다"는 말로 설득했고 이는 현실이 됐다. 1년 뒤 바둑학원 측은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며 더 큰 학원을 소개시켜 줬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대일바둑학원이었다. 당시 윤 군에 대해 대일바둑학원 김희용 원장은 실력보다 승부근성이 돋보인 학생으로 기억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실력이 100명 중 14번째였어요. 그런데 1년 정도 지나니까 다 잡더군요. 지기 싫어하고 근성이 무척 강했어요."


이와 관련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윤 군은 같은 학원을 다니던 김은선 씨(현 3단)와의 대국에서 두 점 깔고도 패하자 "사범님 보다는 앞으로 은선이와 두겠다"고 고집, 결국 김 3단을 이겼다는 것. 김 원장은 "어리지만 정말 바둑을 지독하게 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1000국 대국 사건'도 지금까지 바둑계에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 사범이 윤 군에게 "기보를 보고 1000국은 둬야 1급 수준에 오를 수 있다"고 하자 곧장 실행으로 옮긴 것. 김 원장은 "말이 1000국이지 그걸 언제 다 둡니까. 그런데 밤낮으로 두더니 1000국을 채우고는 1급 실력인 제 사범하고 맞바둑을 두더라구요"라며 자신의 지도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꼽았다.


지금이야 윤 군을 키운 것이 '8할'은 고집과 승부욕이라지만 어릴 때 윤 군의 부모님은 이 때문에 고민도 많았다. 한 번 갖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 앞에 주저앉아 해가 지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어찌나 고집이 센 지 오죽하면 아버지 친구들은 어린 윤 군을 '탱크'라고 불렀다. 어머니 한 씨는 아들이 외곬수가 될 것 같아 음악이나 글짓기 등 다른 것들을 시켜봤으나 결과는 허사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면 도무지 하려고 들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선택의 갈림길이 왔다. 공부와 바둑, 윤 군의 부모는 공부를 택했다. "바둑은 최고가 되어야 하는 승부사의 세계라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전국에서 100명만 뽑는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간 상태였지만 그만 두고 집에서 한 달간 쉬게 했다. 그 후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킬 심산이었다. 그러나 한 달 동안 집에서 학교 교재를 넘기던 윤 군은 공부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학교 공부라는 것은 정답이 있고 답이 보인다.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겠다. 반면 바둑은 답이 없다. 그러니 바둑을 해야겠다"는 것이 윤 군의 말이었다.


윤 군은 한국기원 연습생 시절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우승 경력도 없었다. 한국기원의 연습생들은 실력에 따라 1조부터 10조까지 나뉜다. 상급조로 올라가야하는 데 윤 군은 대부분 끝 조에 턱걸이로 붙었다. 정용진 바둑 칼럼니스트는 "아마도 프로 기사 중 가장 초라한 아마 경력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01년 입단(14세) 후 105일 만에 7회 LG배 본선에 올라 당시 최단기간 세계대회 본선진출 기록을 세운 뒤 그 해 12월 기성전 도전자결정전에 올라 조훈현 9단을 상대로 첫 판을 따내며 바둑계를 흥분시켰다. 비록 조 9단의 노련한 반격에 휘말리며 2:1로 역전패 당해 아쉬움을 남겼지만 이 사건은 그를 주목할 만한 신인 반열에 올려놓았다.


조 9단과의 일전 이 후 윤 군은 번번이 4강 문턱을 넘지 못하며 약 5년 동안 '미완의 대기'에 머물러있었다. 그가 다시 바둑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은 3월 제50기 국수전을 생애 첫 타이틀로 장식하고부터다. 5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정용진 씨는 "남들은 윤 국수가 갑자기 좋아졌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르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실패를 겪으면 공백기를 둔 뒤 그 시간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갈고 닦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잃어버린 5년'은 '미완의 대기'이자 자존심 센 소년 윤준상을 국수로 단련한 시간이었던 셈이다.


유성운기자 polaris@donga.com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4-29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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