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하나님의 언약 - 할례와 세례

2009.05.27 15:51

윤봉원 조회 수:1231 추천:86

준비된 하나님의 언약 - 할례와 세례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 <기독교 강요> 성례편

"이러한 세속적인 행위는 유럽 사회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권이다."
-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
  
1. 삐뚤어진 세례의 의미

"잠기다, 가라앉히다"(Baptiso)의 어원에서 보듯 초기 할례를 받았던 유대인들에게는 바울의 침례 행위로써 침례교가 개신교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물에 완전히 잠기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인데, 사실 반드시 몸이 깊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죄를 씻는 것은 아니며, 예수가 원하는 바도 절대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세례는 표징(Sign)을 나타내는 "하나님 안에서의 동의서"이며 그러한 구실로서의 '인'에 도장 찍는 정도로 이해해야 하는 바, 반드시 물에 침수해야만 구원받게 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의 구절을 망각하거나 혹은 예수의 진실 어린 충고에 대한 의미를 배제하는 것이다.

벤저민 드이스라엘리(Benjamin D'Israeli)는 1817년 7월 31일에 12세의 조숙한 소년으로서 영국 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아버지의 영특함이 아들을 대영 제국의 수상 자리에 앉는 영예를 누리게 했다. 아버지 이삭 드이스라엘리(Issac D'Israeli)는 유대 마을의 수장 자리를 버리고 '유대의 관습으로부터 은둔'하길 원했고 벌금을 물면서까지 자리를 버리고 기독교의 세례를 받는다. 당시 유럽 사회에서는 유대인을 핍박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던 때였거니와 몇몇 후한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직업을 제한했다. 정계나 사회에 진출하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며 사실상 모든 것을 차단한 상태였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유대인 역사>(A history of the jews)를 집필한 폴 존슨(Paul Johnson)이 "다시 말해 종교가 사회에서 수행하였던 역할들이 붕괴되면서 개종은 종교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차라리 세속적인 행위에 가까웠다"라는 고백을 하는 대목에서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아야 했다. 이들 유대인들은 개종하면서까지 정계 혹은 사회에 진출하려 했지 진정 개종을 원치 않았다.

이보다 더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례가 주는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세례를 통해 예수가 우리에게 시사하고자 하는 바를 완벽하게 찾는 것이 '잃어버린 예수'를 찾는 순례자의 길일지도 모른다.

2. 언약의 통일성

이승구 교수는 세례 요한과 세례를 받고자 등장한 예수의 장면을 두고서 "백성들에 대한 회개의 세례를 예수가 대신 받는다"라고 잘 요약하고 있었다. 사실 마태복음 3장 14절과 15절에 보면 당시 세례 요한은 할례를 받았던 목이 곧은 유대인들에게 '회개의 촉구'를 선포함과 동시에 '물'로 세례를 주는 행위를 거침없이 쏟아 부으며 다가올 누군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늘 누군가를 기다리던 세례 요한은 갈릴리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자 자신 앞으로 다가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나고서, 늘 하던 세례 주는 행동에 스스로 제동을 걸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자신에게 물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기에, 예수의 세례 받는 것을 거절하고 있었고 이러한 반응에 무덤덤한 예수는 '모든 의를 이루는 것에 허락'함으로 이제 세례 요한은 그분의 큰 축복 도구로 준비되었다. 그 세례로 말미암아 예수는 드디어 그리스도를 주관적이 아닌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푸른 하늘에서 나는 분명한 목소리인 '하늘의 소리'다. 세례 요한에게는 기쁨이요 감동이었을 터, 그것이 바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 13:17)라는 메아리다. 비둘기와 함께 푸른 강 위에서 메아리가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구약적 할례로서 '언약의 표(Sign)와 인' 그리고 신약의 이러한 세례적 형태로서, 이들은 서로 매우 밀접하다고 이승구 교수는 말한다. 동일치 못할 것만 같은 이질적인 두 가지 사건을 비교해 "언약의 통일성"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바로 구약의 형태와 동일하게 신약 또한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3. 신·구약의 준비된 하나님의 언약

서로 달라 이질적일 것만 같은 구약과 신약의 언약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구약의 형태, 즉 "할례 받은 자" 혹은 "할례 받지 못한 자"에 대한 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혀 없을 것 같은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창17:12)를 막론하고 노예의 계보까지 언급하며 하나님은 법적인 언약 관계를 통해 추후 벌어지는 이방인과의 관계성을 암시하게 된다.

게다가 이러한 사건으로 시작한 '구약의 큰 원칙'인 아브라함 후손들의 할례를 통해 선택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내포하는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신·구약을 통틀어 이승구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 "준비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총괄되어 포함되어 있다. 세례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예수는 율법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으며 회개적 측면까지 부합되지 못하는데도 그는 일부러 준비된 구약적 예언과 이를 완성하여 자신의 언약 안에 넣어 수행하기에 이른다.

구약의 할례가 예수의 세례로 전환되어 새 언약인 "제자 삼는 것"과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의 형태로 뒤바뀐다(마28:19).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바로 오순절 사건으로 매번 그곳에 모인 자들과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로마의 나그네 혹은 예루살렘과 여러 지방에서 온 바람과 함께 갑작스런 기이한 방언(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을 듣고자 모인 자들은 그의 설교로 인해 마음이 찔리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의 선사를 갈구하게 됨으로 이방인이건 할례를 받은 사람이든 간에 성령 앞에서 모두 새 언약의 형태를 존중하고 따르게 된다. 이러한 세례를 받은 사람 수천이 성령의 힘을 받아 다음으로 해야 할 "기도"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행 2:37-39).

"비록 이 시기에 유대인들에게 물리적인(Physical) 할례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영적인 가치(Spiritual value)로서의 할례적인 부분이 세례로서 다시 태어나게 되면서, 이제부터는 할례적 의미가 사라지기 시작한다"고 이승구 교수는 세례를 받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난처한 유대인들의 상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오순절 설교 이후 이제 유대인들이 '구속사 사건'을 중심으로 완전한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할례를 받은 이방인들이든 간에 지구상에 모든 자들은 할례적 의미가 퇴색되어 급기야 사라지기 시작하고 예수의 물과 성령 세례는 존재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전부는 아닐지라도, 자유주의 유대교들은 여전히 메시야, 즉 민족 전체의 민족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사상에 포함하고 있다. 오히려 세례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세례를 받은 유대인들도 죽을 때까지 유대인이었으며,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약에 나타난 언약의 표가 된 후에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인이자 세례를 받은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전개되었던 시기에 과연 늘 믿는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주었을까? 그들의 자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갓 태어난 아이들도 세례를 받았을까? 그런 사이에 이제 천주교로서 기독교 세력이 확장되어 넘어간 뒤에 믿음과 세례 간의 밀접한 관련이 사라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믿는 사람들만이 진정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4. 유아세례와 신앙고백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과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조차 고백하지 못하는 갓난아이는 과연 태어나자마자, 아무 의지력이 없이 이내 과거 세례 받았던 부모 손에 이끌리어 신앙 고백도 제대로 못하고 이대로 유아세례를 받아야만 하는가? 아이의 의지를 꺾어서라도 구태여 진행해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하는가? 이들에게 그 어떤 권한으로 유아세례를 주지는 못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은 자들은 성인이 되는 어느 기준이 되면 믿음에 대한 신앙고백으로서 다시 재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세력들이 모였다.

이러한 혼란은 또 다른 집단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들은 재세례파(Anabaptists)로 구분되었는데, 또 다른 명칭으로 'Believer Baptism', 즉 "믿는 자(성인)의 재세례"로 종교 이론상 혹은 이해 관계상, 규율의 해석차이로 인하여 재세례파의 소규모 집단들 중에 하나로 분파된다. 또한 유아세례를 주지 않는 침례교 역시 이에 해당되는 듯하다. 한 예로 Faith Community Church에서는 몇 살이 되어야 세례를 베푸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믿음에 있어서 신뢰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기(Old enough to give a believable profession of faith)"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아이들에게 받아들일 능력도 혹은 안으로도 믿음이 생길 수 없거니와 돌보지 못할 경우 죽음에 이르는 유아의 인생에 있어서 칼빈의 주장은 이들 중 일부는 바로 천국의 상속자로 만든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무수한 증거들이 있다"라고 그는 당당하게 주장하고 나선다(마 19:14). 바로 예수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데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자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들고 나온다.

아무리 믿음을 구별하고 신앙에 대해 인식할 나이가 된다고 한들, 교회를 다니며 죄를 짓고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교인들, 전혀 그럴 거 같지 않는 얼굴을 하고 평상시 두 주인을 섬기는 유대인들이나 교회 다니면서도 다른 물정에 관심 있는 우리 인간은 다를 바 없다.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유대인들의 자손들과 할례 받은 부모의 아이들은 그 아이의 의지와 행위에 관계없이 난지 8일 만에 행한다. 그의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알든 모르든 간에 자손에게도 마찬가지로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가? (창17:12)

어떻게 보면 언약의 통일성과 언약 신학적 사고를 하지 못한 재세례파도 있고, 자유의지를 갖고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자들은 여전히 있다. "은혜 언약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이승구 교수는 '간접적 거룩성'을 말한다. 바울이 언급하는 것은 부부가 한 쪽만 믿어도 거룩한 가정 안에 한 울타리가 되는 것처럼 유아도 거룩함으로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시사한다.(고전 7:12)

부모의 영향 아래 이제 세례를 받았다면 신앙을 법칙주의로 따지는 감리교(Methodist Church)의 신앙 문제나 천주교들처럼 전통적으로 그래왔다고 주장한다면 성경적인 이유는 사라진다. "간접적 거룩성"에 젖어 든 가정은 이제 믿음의 영향력을 펼쳐 믿지 않을 것 같은 자녀 혹은 여전히 믿지 않는 남편 혹은 아내에게 기도와 사랑을 쏟아야 하는 고민을 해야 한다.

아이가 다가올 때 금지하지 아니한 예수가 유아세례의 교본으로 절대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포함시키신 것은 언약의 통일성 면에서는 같이 가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 재세례파에게는 유아세례를 배제한 것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교회는 반드시 갓 태어난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주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깊은 고민에 잠겨야 한다. 스스로 아이에게 세례를 주느냐 마느냐에 관한 토론보다는 진실한 유아세례를 대신할 만한 그 무엇이 있는지 혹은 유아에게 언약 공동체가 없어도 되는가? 혹은 새 언약 공동체 안에 과연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적 의미로 아이나 어른이나 하나님 안에서는 동일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기에 가능한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 부모의 신앙이 체계화 되도록 도와, 아이가 교육과 신앙의 믿음 안에서 쑥쑥 자라도록 해야 한다. 이 땅 가운데서 아이가 유아세례를 받은 후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제대로 "Conservation(돌봄, 보호)"해야 한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자라 하나님나라의 지도자가 한 명 배출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알리는 기쁨이요 행복이 아닌가? 그 아이에게 불행이 닥친다면 그것은 모두의 책임이다. 물론 제일 먼저 자신의 책임이지만 그 뒤에 부모요, 교회의 책임이다.

"세례는 공인하는 표와 그리스도인을 세례 받지 아니한 사람과 분별하게 하는 표적이 될뿐더러 중생 곧 신생의 표가 되는 것이요, 또 어린이에게 세례를 행하는 것도 교회에 보존할 것이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 1784년 제 17조 세례 문항 발췌-

출처: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580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5-2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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