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사회참여 - 김세윤 교수

2009.09.12 14:40

윤봉원 조회 수:1724 추천:58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셨는데, 이는 예수만의 독특성이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개념이 주로 쓰였는데,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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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의 사상가운데 나타난 구약사상
  ▶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
  ▶ 안식일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태도
  ▶ 하나님 나라와 가이사의 나라(국가,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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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사상가운데 나타난 구약 사상
  예수의 사상은 구약의 사상을 근원으로 한다. 그리고 구약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아래와 같다. 첫째, 창조사상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이고, 땅은 인간들의 거처이다. 이 하늘과 땅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즉 하나님이 온 우주의 주인이신 것이다.
  둘째, 언약사상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백성삼아 그들의 왕이 되신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것으로, 내가 너희(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에게 복을 주고, 이끌어 주겠다고 하셨다. 이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백성 : 왕)과 같은 개념이 (이스라엘 : 하나님)의 개념이다.
cf) 타락사상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도록 설득하는 사단에 의해서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이다. 이는 병에 걸려 있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것으로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virus vs 감기의 증상, 사탄 vs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인간이 비교되겠다. 인간의 죄를 지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금방 뿌리가 뽑힌 나무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즉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사탄의 종이 된 모습이다. 살아있지만 곧 죽을 것이 뻔한 모습이다.
  셋째, 종말론적 소망이다. 이는 언약사상이 발전한 것으로 "주의 날, 주의 때, 그의 날" 등의 말로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의를 펴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날을 나타낸다. 반대로, 불순종과 완악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이는 구약 선지자들의 공통된 선포이다. 그리고 "주의 날"의 개념이 심판(다수의 패역)과 구원(소수의 남은 자)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묵시문학의 발전에는 시간적 이원론이 존재하는데, 이는 이세상과 오는 세상에 대한 구분이다. 이세상은 사탄의 통치아래 있는 세상이며, 죄악과 죽음의 세력을 끊고 오는 "그의 날(메시야 재림)" 이후에 오는 세상은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이다. 이를 잘 표현 하는 것이 카드쉬 기도문인데, "곧 곧 오셔서 통치하소서"라는 내용이다.
▶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
① 미래에 올 하나님의 나라
  주기도문(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잘 가르치신 기도문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해서 땅 위에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게 하소서. 땅위에 죄악 가득한 사탄의 통치가 있는데, 이 통치에서 벗어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이를 통해 볼 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적인 뉘앙스보다 통치, 즉 역동적인 뉘앙스가 강한 것이다. 여기다 저기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특별히 여러 비유를 통해서 임박한 미래로 표현하셨는데, 도둑같이 온다고 하신 것이 좋은 예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그의 나라가 베푸는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으로 깨어 있어 그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라고 하셨다.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 중 한 가지는 하나님을 아빠(ABBA)라 부른 것이다. 유태교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왕과 백성에 비유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으로 비유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라고 출 4:22을 통해서 볼 수 있다. 특별히 구약에서는 아들은 아버지의 상속자였다.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는 것처럼,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요함에 힘입어 사려고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유태인들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전능자로서의 하나님을 너무 강조한 것이다.
②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생겼나?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구체적인 기술(외적인 묘사)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강조했다. 죄용서, 의로움을 입음, 아들 됨, 영생, 등을 통해서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르치셨다. 특히, 이를 잔치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다. (마 8:11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는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셨나? 그것은 잔치의 강력한 상징성 때문이다. 풍요로움, 배부름, 기쁨, 만족, 사랑의 분위기 등이 바로 잔치의 강력한 상징성이다.
이와 반대로 인생이 상징하는 것은 가난함, 결핍성(돈, 시간, 나의, 장소,...), 욕구불만, 슬픔, 갈등 등으로 인생은 이런 것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 세상에서 무한하시고, 초월하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하나님나라를 설명하셨다. 이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했을 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이 영생은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것으로,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음으로 하나님이 누리시는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③ 묵시문학, 랍비문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구약에 나타난 오는 나라는 저자들에 의해서 과장되고, 현란한 언어로 설명하여, 상징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를 물질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예로서 묵시문학에 전해오는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은 것을 모두 찾는다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함으로 잃은 것이 있는데, 얼굴의 광채, 키(장대함, 힘), 하늘의 빛나는 광채, 땅의 열매, 나무의 열매 등이라고 한다. 즉 종말이 되면, 모든 것이 회복되어 다시 다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부요하고, 풍요로운 잔치로만 비유하셨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이다. 물질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잔치로만 비유한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이 인간의 약함으로 평가 절하되지 않는 것이다.
④ 예수를 통해서 실제가 되는 나라
요한의 사역이 끝나고, 예수로 말미암아 새시대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
마태복음 12:22-32절
22 그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좇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좇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는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22-32절)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표시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유대문서에는 사단의 별칭이라고 바알세불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 자신이 성전의 주라고 한 예수를 비꼬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다. 적대자들은 예수가 귀신을 쫓아낸 것이 하나님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고, 가나안 신의 힘으로 쫓아냈다고 말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면, 그것이 합당치 않은 이유를 두 가지 댄다. 첫째, 논리적으로 합당치 않다. 어떻게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느냐? 둘째, 너희들도 귀신을 쫓아내는데 그럼, 너희도 귀신의 힘으로 좇아내느냐?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시며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말하신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증되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증거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사탄은 강하나, 예수는 사탄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다른 말로 예수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힘이 이 땅에 나타났고, 이를 통해 귀신이 쫓겨났고 사탄이 결박되었고, 결국은 사단이 완전히 쫓겨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 땅에 하나님의 힘의 시위를 나타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탄이 쫓겨남에 따라 의와 사랑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언제 사탄을 결박하셨는가?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에서 사탄을 결박하셨다. 광야에서 사단을 묶으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사탄을 등뼈를 꺽으셨다. 그리고 최후의 그날에 사탄은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아직도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 그 꼬리가 살아남아 사람들을 유혹에 빠뜨리려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하신 사역을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그 후 예수님은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사단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사단의 통치가 약화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강화되는 것을 나타낸다.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 나라 선포의  실제이며, 해석이고, 주석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선포되고 실현되는 것은 병고치고 귀신을 좇아내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통치의 확증인 것이다. 병은 정신적, 육체적 것을 모두 말하며 포괄적인 모든 고난을 의미한다. 귀신은 일체의 압제와 구속을 의미한다. 이 일체의 압제와 구속 속에 있는 것을 풀어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구원의 힘이 드러나는 것이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말씀이 있다. 복음 선포는 종말의 구원약속뿐 아니라, 지금 현재에 실제가 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힘이 구원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복음이 선포되고, 회개하고, 순종과 변화의 삶이 있다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  안식일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안식일은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신다. 안식의 기원은 태초의 창조 후 창조된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즐김이었다. 완전히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시기였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사탄의 말을 듣게 됨에 타라, 인간들은 사탄의 통치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피조세계는 먹고 살아야 하는 생업의 수고를 해야만 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음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사탄의 통치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셨다.  그 구원의 끝은 종말이며 구원의 완성으로, 사탄이 완전히 정복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곳은 심히 좋은 곳이며, 진정한 안식이 있는 곳이다.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음이 생기는 곳이며, 생업의 수고가 없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치셨다. 태초의 완전한 창조를 기념하고 종말의 완전한 재창조를 기다리는 그런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치셨다. 이는 예수님의 극적인 표현으로 피조물에는 안식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는 사탄의 통치속에 서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옮기시는 분이시다. 사단의 통치속에 있는 손마른 자를 고치심으로 사탄의 통치를 꺽고 진정한 안식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생업을 중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업의 의미는 자기 힘으로 행복을 얻는 데 있다. 이는 사탄아래 있다는 것을 역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 의존적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거저주심을 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거저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이 시대에 안식을 어떻게 기념하는가?
  생업을 쉬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안식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통해 실현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손마른 자를 고치셨듯이, 사탄의 권세아래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권세 아래로 옮기는 일을 하는 것이 안식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구제하며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날이 되는 것이다. 즉 이웃을 돕고, 섬기는 날로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안식일에 무료로 병자를 고쳐주는 의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 치료를 통해서 돈을 벌게 된다면 그것은 생업위한 것이 되므로, 안식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용어는 주로 동사로 쓰였다. 온다. 임한다. 주신다. 주어진다. 들어간다. 받는다. 그러나 이룬다. 확장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쓰신 적이 없다.
①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과 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초월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속에 내재한 그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재 세상에서 완전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의 죄성, 불완전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선포를 통해서 임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확장한다식으로 말을 쓰게 될 때, 이는 인간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말로 들릴 우려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확장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화 초월성이 드러나는 곳이다. 잘못된 말의 사용이 하나님의 은혜와 초월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② 하나님의 나라는 혁명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사상을 뒷받침하는 식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개개인의 회개와 변화를 말하는 것이지,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혁명이 아니다. 죄를 회개함으로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왕으로, 주로 시인하며, 죄의 용서, 올바른 관계회복, 완전한 헌신과 절대적인 사랑을 누리는 것을 말하며, 이로써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③ 특별한 개혁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변혁을 위한 열혈당(극운동파) 운동이 아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도 나타나듯이 하나님 나라는 조그마하게 시작해서 그 결과를 이루어 낸다. 예수님께서 시작한 하나님 나라는 갈릴리 부재지주들의 횡포와 로마제국아래의 식민통치아래에서 갈릴리 변두리에서 시작한 아주 미미한 운동이었다.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 그것은 소리 없이 심기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운동에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자라서 많은 새들(민족)에게 앉을 자리를 준다. 이 운동은 점진적이나 필연적으로 진행되는 운동이다.
  하나님 나라는 집과 성전에 비유된다. 이집에는 아빠가 있다. 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가게 된다. 열쇠는 베드로가 가졌다. 거할 곳이 많은 방이 있고, 방안에는 아버지가 베푼 잔치가 펼쳐져 있다.
④ 들어가다. 받는다. 상속받는다. 유업으로 받는다.
성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개념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첫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어린아이가 아빠를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이어야 한다. 셋째, 의인이라야 한다.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뛰어난 의를 가져야 한다.
▶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태도
  마가복음 14: 58절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을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가지신 성전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자. 예수님은 신성모독과 성전 파괴 위협 죄목으로 산헤드린에 체포되셨는데, 그 죄목은 아래와 같다.
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무시했다.
② 스스로 성전의 기능을 성취했다고 주장했다.
  성전의 기능은 죄의 용서와 성결이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에 대해서 죄를 용서하셨고, 혈루병이 든 여인을 고쳐주심으로 그 여인을 성결케 하셨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뒤틀려 있어 회복이 필요한 자에게 그의 권위의 말씀으로 용서하시고, 성결케 하셨다.
  마가복음 7:15,16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새로운 정결의 법을 세우셨다. 정결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조건이다. 레위기에서는 제사장의 정결을 위한 여러 율법과 전통이 있었다. 이는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가득하나, 예수님께서는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다. 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말한다. 즉 이전까지의 정결의 법은 외부의 것이 사람을 더럽게 했지만, 새로 생기는 법은 사람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신 것이다.
③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을 소란케 하셨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의 한쪽 구석에 있었던 조금만 소란에 불과했다. 475M*300M 크기의 넓은 성전 뜰에, 당시 상주인은 5만, 유월절은 20만정도가 몰려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게다가 로마군대는 혹시나 있을 소요를 막기 위해 600-700명이 이 성전을 감시했다.
  한쪽 구석에서 일어난 성전소란 사건은 심판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돌 하나 위에 돌 하나도 없을 것임)될 것과 자기가 성전을 지어 제사의 기능을 성취할 것이라는 메세지의 상징행위였다. 이는 구약선지자들의 전통으로서 이사야가 예루살렘 거리를 발가벗고 다녔던 것에 비할 수 있다.
  마가복음 11:27,28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이는 산헤드린의 예수님에 대한 예비심문으로서 예수님의 행동(성전파괴와 성전기능의 회복)을 눈치 채고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서 예수님은 다시 물으신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라고. 그들은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부터 왔다면 그들이 예수를 믿어야하고, 아니라고 하면 세례요한을 따르는 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성전소란과 세례요한의 세례는 무슨 관계가 있길래, 예수님은 이 질문을 하셨는가?  이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서 이 일을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시2, 시7편을 등극시라고 부르고, 삼하 7:12-14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이사야 42장 주의 종의 노래 등에서 나타난다.
  나단의 신탁은 성전의 건축을 네 아들(솔로몬)에게 짓도록 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너(다윗)의 수가 다하면 너의 씨를 일으켜서 그를 네 왕위에 앉히고, 그리하여 너의 가문을 세우겠다는 말씀이다. 이는 솔로몬을 통해 성취되었고, 다윗의 자손이 왕이 될 때마다 등극시를 읖었다. 솔로몬의 몰락이후 메시야 사상이 고취되고, 나단의 신탁을 통해서 다윗의 아들, 다윗의 씨를 통해 다윗왕조의 재건을 기대하였다.    예수님의 권위는 나단의 전승을 계승하고, 시편 7편에 나오며, 세례요한의 세례가운데 나온 너는 내 아들이라는 하나님 아들의 권세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손으로 짓지 않은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 자신의 고난,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돌아가신 속죄의 제사를 통해서 성전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이루어졌고, 성전은 AD 70년에 로마군에 파괴되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선포하셨고, 그 성전은 손으로 짓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럼, 그 성전은 무엇으로 지어지는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사단(죄악, 죽음)의 나라, 통치 영역에서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하나님의 통치영역(사랑, 의, 의)의 영역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이다. 이 들어오라는 초대에 포함된 약속은 엄청난 잔치이다. 아버지가 베푸시는 이 부요한 잔치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고 하셨다. 그의 초대에 세리, 창기, 가난한 자들은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했으나, 부자와 의인으로 불리는 자들은 이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에게 먹기를 탐하고, 술을 좋아하고,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기도를 통해서 그 부요함을 맛보아 알게 하신다. 기도를 통해 장차 있을 잔치의 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그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상속자로 만들기 원하신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그는 이 일을 하셨다. 마가복음 전반부(막1장-8:29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과 후반부(8장30절-16장 끝)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전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후장에서는 죽음의 예고를 하셨다. 전반부에서는 인자께서 무엇을 주시는 가에 대한 이야기였고, 후반부에서는 어떻게 이루어 가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예수님은 전반부에서 구원의 약속을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결핍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부요함을 누리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에 대해 말씀하셨다. 잔의 말씀(막14:24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사야 54장의 주의 종으로서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의 말씀과 출 24장 언약의 제사, 피, 언약의 피 등을 통해서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자기의 노력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새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옛 언약을 능가하는 새 언약의 성취를 말씀하고 계신다.
   그의 성전파괴 재판을 계속 살펴보자.(마14:58-) 예수는 성전을 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하셨다. 왜냐하면, 성전을 부수는 것은 예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고, 새로 짓는 것은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에 대답할 수 가 없었다. 예수는 네가 메시야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나단의 신탁을 이해하고 있는 산헤드린 재판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성전을 예수가 부술 것이라고 생각하고 형을 집행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파괴 하셨다.
  예수님은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지으실 것이다. 그것도 사흘만에(호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는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를 통해 패역한 백성을 사흘만에 회복할 것을 말씀하셨다. 사흘만에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지으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이며, 그것이 성전이다.
  구약의 전승사적인 발전을 통해서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았으나, 예루살렘 성전의 패역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에센파는 사막의 공동체를 세우고 그 공동체에 하나님이 함께 거하신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는 견해가 나타났다. 즉 에센파의 사막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았다.
  참고로 당시 세례요한의 공동체는 목욕공동체였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받는 사람에게 거듭남을 의미했다. 오늘날 매일 세례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목욕이 주는 의미로 날마다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메시야적 과업은 새 성전을 짓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려졌고, 그것은 새백성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제자들의 견해는 끔찍한 것이었고, 유대인들의 견해는 저주받은 것이었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대속의 죽음은 옳은 것이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그의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했다. 이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다. 예수님은 약속하셨고, 제자들은 그것의 성취를 위해서 일했다.
그럼으로 베드로와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다. 제자들에게 약속보다는 성취가 더 중요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은 예수님께서 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분부하신 말씀, 죽음과 부활을 전했다. 그것이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였다.
▶  하나님 나라와 가이사의 나라(국가, 정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은 여러 종류로 나뉜다. 신정주의자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이 실현되는 것을 위해 노력한다. 존재론적 이원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영은 살고 육은 죽는다. 종말론적 이원론은 타락을 멀리하고, 영혼구원에 치중하는 것이다. 금욕주의적 도피주의에 해당된다.
  보수주의는 종말론적 이원론을 취한다. 정교를 분리하여 영의 구원에 힘쓴다. 진보주의는 신정주의에 힘쓴다. 이는 사회개혁을 통해서 이 땅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보수주의가 종말론적 이원론을 주장하며 영혼구원에 치중하는 것은 마가복음 12:17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라는 말씀을 통해 주장한다. 이 말씀이 나오게 된 상황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의 차이에 있다. 헤롯의 야당격인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것을 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헤롯당원은 헤롯에게 내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이 예수님의 답에는 강조점이 뒤에 있다.  가이사-가이사 그리고 하나님-하나님. 실제로 그리고는 그러나로 번역해야 옳다. 예수는 후자에 강조를 두었다.  그리고 데나리온(하루품삯)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가이사의 은전을 보여주었다. 열혈당인 바리새인은 가이사의 은전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우상숭배로 보아 십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세금을 가이사의 은전으로 내지 않았다. 그 가이사의 은전을 가져온 것을 보면 그들은 가이사로 인한 복을 누리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이사의 은전은 로마의 번영은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가이사의 덕을 보고 싶으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라, 그러나, 하나님에게 속하였으면 하나님께 내라. 하나님께 속한 것을 보수주의자들은 전도, 봉사, 헌금으로 한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 아래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쉐마(신 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은전을 가지고 오라고 하신 이유는 가이사의 형상을 띤 데나리온과 하나님의 형상을 띤 인간을 대비하려는 것이다. 가이사의 형상을 띤 데나리온을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형상을 띤 인간을 통째로, 전체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이 담겨있다.  당신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통째로 하나님께 드려라. 전적인 헌신, 이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의무인 것이다.
  정치에는 사단적인 욕망이 있다. 자기주장하려는 의지가 있다. 민주주의에도 있을뿐더러, 전제주의 공산주의에는 더욱 있다. 정치에는 불의와 압제가 따르고 치자와 피치자가 있고,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있다.  절대적으로 좋은 정치는 인간의 자기주장이 완전히 포기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정치의 본래의도가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는 희망이 없다. 열혈당이나 헤롯당에게는 희망을 걸 수가 없다.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피착취의 구조를 해방시킬 방법이 없다.
상대적이지 않은 절대적인 문제의 해방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인 죄 또한 인간이 자기주장하려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해방된 절대적인 구원을 주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다.
   편파적인 사랑 - 가난한 자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 - 부유한 자에 대하여 부의 우상성 경고, 하나님 나라 - 회개하는 부자에 대한 관용과 사랑, 갈릴리 부재지주 - 사회적인 비평을 가하지 않았다.   부자의 맘몬 의존성과 가난한 자의 맘몬추구가 비난의 핵심이다. 부자는 이웃을 돕기 위해 돈에 너그러움을 가져야 한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께 의존하고 돈에 대해 한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해야 한다.
  자기주장 하는 것은 사탄의 통치이다. 하나님의 통치아래에는 자기주장의 의지가 청산된 곳이다. 따라서 정치가 있을 수 없다. 이는 산상수훈에서 잘 나타난다. 산상수훈은 이 세상의 정치가 종결된 곳이다. 이 세상의 가치가 전도된 곳이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현실에 참여하는가? 출범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나야 한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며 출범한 하나님 나라를 이끌고, 종말에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실현되는 것만큼 산상수훈의 윤리가 실현되어진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나 자신을 주장할 것인가? 나 자신을 버릴까에 대한 시시각각의 선택이 있다. 이때 산상수훈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양보하며 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우리자신도 완성된 믿음의 결단과 결과를 나타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결단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한다. 나누어주고 양보하고 고난 받는 것이 복 있는 자라고 산상수훈은 가르친다.
   개인윤리의 표현인 믿음이 사회윤리로 표현되어진다. 믿음은 구조상 윤리(행동)으로 표현되어지게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선하게 살뿐 아니라 사회구조를 선하게 되어져야 한다. 착취와 억압의 해방을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회개혁은 반대와 비판, 저항이 있었다. 이에 말과 비폭력으로 저항하셨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따라서 폭력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시위는 있을 수 있다. 데모 우리의 의사는 표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과 비폭력의 가르침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모순이 존재한다. 그것은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제자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로마가 기독교로 물들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어떻게 자기주장이 많은 정치속에서 자기를 버리고 사는가? 만약 이 사회속에 불의가 존재할 경우 의로운 전쟁을 통해 보다 큰 악보다는 보다 작은 악을 택할 것인가? 아님, 절대 평화주의로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랑과 순교의 자세를 견지하겠는가? 이 문제에는 한 가지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인간이 감히 신적영역에서 의로운 전쟁을 하여서 보다 큰 악을 선택하는 것이 보다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것과 그냥 가만히 참은 절대평화주의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이다라고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불완전함으로 인해서 극한 상황속에서는 보다 작은 악을 택하고 현실상황에서는 사랑과 순교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좋은 길일 것이다. 이것이 기독인의 사회참여의 기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출처: http://cafe.daum.net/orpi/RMHR/6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9-12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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