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4:1-1115-03-27 금새
첫째. 두 종류의 길을 대조 시키시는 하나님.
성경은 참 재미있고도 은혜롭다. 알면 알아갈수록 명확하다. 문제는 아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 항상 숙제라는 것이 평생의 숙제이다.
오늘 본문도 본 단락의 시작인 1-2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절기를 앞두고 짐승을 잡아야 할 자들이 짐승은 잡지 않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기록해 주셨다.
그리고 본 단락의 마지막 부분인 10-11절에서 위의 사람들과 같은 맥락인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 서는 장면을 기록해 주셨다.
이 둘을 시작과 끝에 둠으로써 예수님께 가장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자들의 배신을 명확히 하고 있다.
반면에 본 단락의 중심인 3-9절에서 마리아(요 12:1-3)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300데나리온(300일 품삯: 요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1500-3000만 원정도)이나 되는 향유를 한꺼번에 예수님의 머리에 부음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예비하는 행동을 보였다.
이러한 행동은 이 여인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책망과 욕을 얻어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행위를 대 칭찬하신다. “가만 두어라…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더 나아가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라고 대 칭찬을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리아의 옳은 행동은 약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뇌리 속에 본받을 인물, 존경하는 인물, 따라 가야할 모델로 각인 되고 있다. 마리아는 죽어서도 일하는 사람으로 멋지게 살았던 것이다.
둘째, 두 신앙노선의 차이는 어디서 생긴 것일까?
이 본문을 묵상하면 위의 두 신앙노선을 걷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가 궁금해진다. 본문에 그 답이 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가룟 유다의 행동에서 특이한 점은 그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사람들의 눈치 보고 모든 것을 결정했다. 만약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면 이렇게 영원토록 부끄러움과 멸망, 수치의 모델이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반면에 마리아는 자신의 행위가 예수님에게 대 칭찬 받을 행위를 한 것인 줄 미리 알았는지 몰랐는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런 그의 행동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으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 때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즉시 온전히 순종함으로 온 결과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뜻을 구했느냐? 안 구했느냐? 그리고 그 뜻을 깨달았을 때 즉시, 온전히 순종했느냐? 안 했느냐? 에 따라서 영원토록 영광과 수치, 칭찬과 책망, 본받을 사람과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결정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 그렇다면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
이렇게 본문은 마땅히 충성을 보여야 할 자들의 반역과 ‘한 여인’에 불과한 마리아의 전심을 다한 충성과 헌신을 대조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를 요구하신다. 마리아의 헌신과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헌신 등을 묵상하게 하심으로써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도 모든 언행심사를 하기 전에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를 기대하신다. 나의 판단과 기준,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 즉 성령의 인도를 구하고 따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감(靈感)을 받았을 때는 즉시 온전히 순종하라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영향을 받지 말고 철저히 하나님의 의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는 주인공이 되라고 명령하신다. 아멘!! 오늘 우리의 삶,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전부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리아처럼 죽어서도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