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20:1213-08-11 주후날자: 2013년 8월 11일 주일오전
제목: 여호사밧의 기도
본문: 역대하 20장 12절
1. 인간의 생사화복, 흥망성쇠, 존비귀천은 무엇에 달렸나?
인간의 생사화복, 흥망성쇠, 존비귀천은 과연 무엇에 달렸을까? 그의 예외 없이 신불신간에 사람들은 이 문제가 인간에게 달렸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인간의 노력, 탁월한 지도자(예를 들면, 목회자로서 성공하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도사들을 나는 여럿 접해 봤다.)를 마는 것, 아니면 자수성가형처럼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믿고 그렇게 행동한다. 과연 그런가?
실제적으로 사람들은 신체적 질병, 경제적 어려움, 대인관계의 어려움, 정신적 스트레스 등과 같은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처리하려고 힘쓰는가? 하나님은 제쳐두고 인간끼리 해결하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치는가? 그렇게 하다 하다 안 되면 마지막에 가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고 하나님을 찾는 서글픈 일이 아닌가?
이것은 마치 119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이 나지 않으면 소방서에 전화를 걸지 않는다. 물론 요즘은 불이 아니라도 응급 환자가 생긴다든지 하면 전화를 건다. 어쨌든지 119에 전화를 할 때는 자신이 할 수 없는 급한 상황, 절박한 상황을 만나면 119로 전화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도 이렇게 찾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라고 분명히 선포하셨다. 우리 인간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무엇인들 할 수 없다.
마치 해바라기는 해가 없으면 살 수도,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그래서 오직 해가 뜨고 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또 해바라기는 같은 장소에서 자라도 병충해와 자연 재해로부터 하나님이 보호 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우리 인간도 이와 꼭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으면 우리도 해바라기처럼 별 수 없는 무지 무능한 인간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일생 만나는 문제를 상대할 때 대해야 할 것인가? 오늘 본문의 여호사밧의 기도를 통해서 알아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여호사밧은?
2.1. 주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믿었다.
여호사밧은 다윗의 길로 행하여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히 강성케 하는 복을 누렸다(대하 17장). 그러다가 그는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했을 때 교만하여 져서 북 이스라엘의 아합과 연혼하는 타락의 길을 걸었다. 또 아합과 동맹하여 아람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아람 군대에게 잡혀 죽음 직면에 이르렀다. 그랬다가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여 겨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남았다(대하 18장).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국의 조직을 정비하였다(대하 19장).
그 시점에 모압, 암몬, 마온 사람들이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침공해 왔다. 이로 말미암아 왕과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했다(대하 20:3). 그 상황에서 여호사밧은 백성들과 함께 금식을 하며 기도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그가 기도할 때 그의 중심에는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은 권세와 능력이 무한하시다는 것을 믿었다(대하 20:6).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 즉 출애굽 사건과 선전 건축과 봉헌, 각종 재앙, 난리, 견책, 전염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받은 것들로 예를 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주관자요, 그의 능력은 전능하심을 온전히 믿고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셨겠는가? 하나님은 기도할 때 의심하며 기도하는 자는 받으려고 생각지도 말라고 하셨다(약 1:6-7). 우리에게도 여호사밧처럼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가?
오늘 우리가 만난 각종 상황도 여호사밧이 연합국을 만나 두려움에 뜨는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며 발버둥을 쳤던가? 그럼에도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만사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고백을 이구동성으로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이 있다. 여호사밧처럼 주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온전히 믿고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런 특권을 온전히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다.
여호사밧은 주님께 기도함에 있어서 세 가지 고백(20:12)을 한다. 첫째, 삼개 연합군에 대해서 자신과 백성들은 대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 바라본다고 하였다. 이 여호사밧의 고백은 진실한 고백으로 보인다. 연합군이 자신을 치러 왔을 때 그들을 보고 두려워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아람과의 전쟁에서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여호사밧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것으로 확정을 지은 것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가? 역사의 주관자, 생사화복의 주권자, 흥망성쇠, 존비귀천의 주관자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한 것 중에서 바로 되고, 잘되고, 성공한 것이 있었는가? 세월을 두고 평가 해 보았을 때 잘 된 것이 있었는가? 있다고 판단을 한다면 착각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다른 일과 물질에 대해서도 우리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어떻게 해야 바른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도 여호사밧처럼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자들이 되기를 본문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는 항상 기도할 때마다 모든 상황과 순간마다 기도하면서 “나는 능력이 없으며, 어떻게 할 줄도 모르지만 역사의 주관자 주님은 다 하실 수 있음에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며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3. 여호와의 역사를 신바람 나게 경험했다.
여호사밧은 역사의 주권자 주님만 바라고 기도할 때 주님은 야하시엘을 통하여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그리고 너희들이 할 것은 전쟁에서 싸울 필요 없이 전쟁터에 나가 줄을 서서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하는 역사를 보기만 하라고 하셨다. 이는 모세가 홍해 앞에서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는 말씀을 생각게 한다.
이 말씀을 들은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하나님 여호와와 선지자를 온전히 신회하라. 그리하며 형통할 것이라고 강권했다. 그리고 아무런 화살이나 군기, 병거를 사용하지 않고 말씀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여호와를 찬송만 했다. 그런데 그 찬송을 시작할 때(대하 20:22) 주님은 유다를 치러온 자들 스스로 치고 박고 싸워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죽임을 당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적군들의 물건이 얼마나 많았든지 사흘이나 걸려서 취하였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브라가 골자기’ ‘브라가 골자기’는 “축복” “송축”이라는 의미이다.
라고 불렀다.
여호사밧의 기도에 약속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에 없었던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셨다. 할렐루야!! 이보다 더 신바람나는 기도 응답의 역사가 어디 있겠는가? 이 말씀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것은 오늘 우리도 우리 자신이 여호사밧과 같은 고백과 믿음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이런 기도 응답의 역사를 경험하도록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함으로 기도 응답의 주인공이 되는 것만 남았다. 반드시 이런 기도 응답의 주인공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3. 주님이 일하시도록 여호사밧처럼 믿음의 기도를 하라!!
여호사밧은 생사화복, 흥망성쇠, 존비귀천의 주권을 이스라엘 왕 아합으로 돌리는 우상숭배를 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인자로 말미암아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덤으로 얻은 이후의 삶은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기도함으로 다시 정상을 회복했다. 그래서는 그는 연합국의 침입에 대하여 자신들은 대적한 능력이 없고, 어찌할 줄도 모르고, 오직 주만 바라보는 믿음의 기도를 금식하며 했다. 그리하여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오늘 우리는 여호사밧처럼 모든 주권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이 아직도 본능이 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한다. 하나님을 119 부르듯이 막다른 골목에 가서 찾았던 것을 온전히 회개하라. 이제 우리도 “내게는 능력이 없으며, 어찌 할 줄도 모르며,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고백하며 기도한 여호사밧처럼 고백하며 기도하여 승리만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의 기도를 들으시고 놀랍게 역사를 하시도록 말이다. 반드시 이런 믿음의 기도의 주인공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