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5:3-102011121433날자: 2011년 12월 14일 수밤
제목: 회개를 기뻐하시는 주님
본문: 누가복음 15장 3절∼10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우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우리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주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 나는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가?
주님 은혜로 새로운 부지에 건축을 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이곳으로 오기 전과 오고 난 이후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우리 교회 소유의 땅과 건물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유익하고 좋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변화를 나는 보고 있다. 그것은 저쪽에서는 전도하는 사람이 김연이 집사님과 아내 두 사람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곳에 오면서 전도에 동참하는 숫자가 널었다는 사실이다. 경화장날 전도, 토요일 전도에 동참하는 지체들이 점점 늘고 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이것을 매우 기뻐하시고 이번 주에도 새로운 할머니를 보내 주셨다. 계속해서 새로운 지체들이 오고 있다.
구 교회에서 일년 걸려서 전도되고 정착했던 숫자가 불과 얼마만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할렐루야!!
이제 본격적으로 전도에 지체들이 동참한다면 어떤 역사가 일어날지 인간인 우리는 아무도 모르고 예상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세운 목적이 복음전파이니만큼 이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우리 진광교회를 보시고 활활타오르는 촛대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 지역에 주님이 택한 많은 지체들이 구원을 얻고 주님의 참 제자로 세워져가는 놀라운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나리라 믿으면 기도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 자신들에게 질문을 해 볼 것이 있다. 이렇게 전도되어 오는 사람들, 또 신앙생활을 하다가 방황하고 고민하고 불행의 늪에 빠져서 헤메다가 돌아오는 지체들을 보고 나는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해 해 하는가? 이다. 내가 전도해서 한 사람이 교회 나오거나 내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매우 기뻐하고 만족스러워하고 행복해 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전도하거나 회개하고 돌아 온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나 기뻐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하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정리해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본문 요약
2.1. 잃어버린 양의 비유
누가복음 15장에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비유는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제자들과 ‘세리와 죄인들’의 무리와 그들을 반대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무리, 이 ‘두 그룹’의 지속적인 갈등 구도 속에서 선포된 것이다.
본문은 예수님이 익숙한 삶의 이야기를 자신의 기쁨을 설명하는 논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죄인들이 회개할 때 가지시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그 기뻐하시는 것 같이 우리도 마땅히 즐거워해야 함을 보여 주려 하셨다.
사악한 길로 들어선 죄인의 경우. 그는 “잃은 양”이며 “길 잃고 헤매는 양”이다. 그는 주님께 “잃어버린 바”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 바쳐야 할 영광과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기 무리에게도 “잃어버린 바” 되었다. 그들과 친교를 나눌 수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도 “잃어버린 바” 되었다. 어디에서 처해 있는지 모르고, 끊임없이 방황하며 목자의 보호를 떠나 맹수의 위험을 받고 늘 공포와 불안에 떨며 푸른 풀밭을 찾아 헤맨다. 우리 주변에 이런 길을 가는 지체를 보라. 꼭 성경대로 분명히 임을 알 수 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좇아서 탐색해 나간다. 열심히 노력하여 마침내 “찾아내고야” 만다. 주님은 뒤로 넘어지는 죄인을 따라가 말씀으로 부르시고 성령의 힘을 입어 마침내 돌아오도록 마음먹게 만드시는 분이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는 목자는 그 양을 집으로 데려 오신다. 비록 양이 지치고, 방황으로 너무 상해서 집으로 데려 올 가치조차 없을지라도 목자는 내버려 두어 멸망당하도록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어깨에 둘러메고,” 온유하고 애쓰는 심정으로 무리 가운데로 데려 오신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위대한 사업에 견줄 수 있다. 인간들은 모두 각기 체질로 가버렸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주님에게는 모든 택한 백성이 멸망한들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주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신다”(19:10). 그리스도는 “그의 팔로 양들을 모아, 가슴에 안아 나르신다.”고 기술 되었다. 그의 동정과 온유함을 불쌍한 죄인들에게 나타내시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깨에 메고” 돌아오신다고 표현한 것은 그들을 지지하고 원조해 주시는 힘을 뜻하고 있다. 그분의 어깨에 매여 돌아오는 이에겐 결코 멸망이 없다.
2.2.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사람은 여기서 “어느 여자”로 가정되어 있다. 은전을 잃은 자는 여자였기 때문에 남자가 이런 경우를 당했을 때보다 더욱 슬퍼했을 것이다. 또 찾았을 때는 남자들보다 기쁨이 더 컸을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이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는 사실은 비유의 효과를 더욱 극적으로 과시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은 단 돈 은전 한 잎. 곧 한 드라크마, 4분의 1세겔이었다. 히브리말로 “은”이란 “바람직스러움”이란 말에서 왔다. 은은 곧 “은전”이고, “드라크마”의 뜻과 같았다. 돈으로써의 가치는 비교적 적어서 단지 7펜스 반 페니에 불과했다. 그래서 죄인을 이 은전에 비유한다면 죄인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진다해도 주님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수고와 고통을 감수했다. 여인은 “등불을 켜고” 문 뒤와 책상 아래를 찾아보고, “비로 쓸며”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이것은 주님께서 잃은 영혼을 우리에게로 오시는 자신의 길을 비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로 향하는 우리의 길을 비추시기 위해 “복음의 등불”을 켜신 것을 상징한 것이다. 또한 말씀에 대한 확신으로 “집을 쓰신다.” 마음을 오직 잃어진 영혼을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함에 집중하여 그는 “부지런히 찾으신다.”
그러기에 그것을 찾았을 때 큰 기쁨이 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은전을 찾았노라”(9절). 마음이 즐거운 사람은 다른 사람도 함께 즐거워하기를 바라는 법이며, 유쾌한 사람은 같이 다른 사람과 그것을 나누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녀는 잃었다 찾은 돈을 거기에 다 써 버릴 것임에도 “함께 즐거워하자”고 이웃을 불러 모았다. 찾았다는 놀라운 기쁨이 즉시 그녀를 정신없게 만든 것이다.
3. 비유의 핵심(核心)
3.1. 주님은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며, 죄인들에게 들인 수고의 대가로 그들의 회개만을 보신다. 거기엔 항상 “천상의 행복”이 있다. 주님은 “그의 모든 사업을 즐거워하시지만” 특히 은총을 베푸심을 그리하시다. 전심과 전인격으로, 회개한 죄인에게 선을 행하시기를 즐겨하시며, 교회들이나 국가들의 회심만 아니라, “단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까지도 기뻐하신다. 비중으로 따지면 아흔 아홉이 많지만 주님은 비중으로 따지는 분이 아니심을 분명히 하셨다.
하나에 대한 가치와 관심을 일깨우고 그것이 기쁨이 되는 이유를 드러낸 것이 본문 교훈의 핵심(核心)이다.
세탁소 사장님의 두 마리 개 중 한 마리는 집을 나가면 집을 못 찾아오고, 작은 개 한 마리를 집을 찾아온다. 그 작은 개는 집나간 큰 개를 찾아서 데리고 오려고 온갖 애를 다 쓴다고 한다. 하물며 주님은 우리 한 사람이 잃어버린 양이 되었을 때 얼마나 간절한 심정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며, 또 돌아 왔을 때 기뻐하시겠는가를 헤아려 보라!!
물론 이 ‘하나’에 대한 폭발적인 기쁨은 통상적인 세계에서는 지극히 낯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가? 한 사람이 회개하든 말든 별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가? 또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와도 “왔는가배” “갔는가배”하고 물 건너 불구경하는 구경꾼은 아닌가? 만약 이런 행태를 취했다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우리도 주님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3.2. 주님의 사자들도 죄인의 회개를 기뻐한다.
주님께는 각 개인이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주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적극적으로 찾고 계시며, 그들이 돌아오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된다. 주님의 사자들은 자비가 죄인들에게 베풀어질 때 비난하기는커녕 기뻐할 것이다. 물론 죄악 된 성벽의 천사들이라면 멸망당하고 아무런 자비를 못 입겠지만, 그렇기 때문만도 아니다. 회개하는 죄인들이 보잘 것 없고 악하지만 회개만 하면 곧 천사들과 함께 교통하며 그들을 닮게 되고 동등한 지위에 오를 것을 알면서도 기뻐한다. 죄인들의 회개는 천사들의 기쁨이요, 그들은 즐겨 회개한 영혼들을 지도하는 영이 된다. 인류의 구원은 천사들 앞에도 기쁜 일이기에 “높이 계신 주님께 영광”(2:14)이라고 노래했었다.
주님은 자신이 죄인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험담하는 사람들에게 이 두 비유를 들려줌으로써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설명하신 것이다.
3.3. 어떤 흉악한 죄인도 회개에 이를 수 있다.
“이 땅 위”에서의 “회개”와 “개종”은 “하늘에서의” 기쁨의 주제이며 즐거움이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회개에 이르는 것은 가능하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라. 초대교회에서 가장 살기등등하고 악랄하기로 명성을 날린 그였지만 주님을 만나서 온전한 회개를 하여 가장 탁월한 전도자로 변화된 삶을 살다 가지 않았는가?
생명이 있는 곳엔 희망이 있고, 어떤 죄악의 사태라도 절망해선 안 된다. 그래서 가장 나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서면 자비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 아흔아홉에 속한다면 회개할 것이 있는 사람은 그 누구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들이 회개할 것이 있다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아멘!!
따라서 우리는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실상(實狀)이 우리 자신이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에서 방황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상과 현실에 깊이깊이 빠져 주님과 거리가 너무나 요원(遙遠)한 상태는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회개하기를 우리 주님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것을 헤아려 빨리 회개해서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을 만나는 자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아멘!!
3.4.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보다 회개한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에 대한” 것보다, “너무나 사악했던 생활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죄인에 대한” 기쁨이 있음을 비유는 보여 준다. 천사처럼 신앙을 늘 보존하고 확증함으로 회개가 필요 없는 것에 보다도 타락한 인간의 구속과 구원에 대한 기쁨이 더욱 크다.
찬양과 기도 생활 가운데에서 “주님 감사합니다.”하는 바리새인이나,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회개할 필요”를 못 느끼고,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들을 더욱 기뻐 여기신다 믿으며, 스스로 “사랑하고” 자기들이야말로 “주님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유대인들에게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이방인이나 세리들의 기쁨이 더욱 크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거꾸로 말씀하시기를, 자신들에겐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길게 중언부언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기도보다는 천대받고 미움받는 죄인들의 회개하며 애통하는 그 마음을 주님은 더욱 칭찬하시며 기뻐하신다고 선포하신다. 바울이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죄인이었던 것같이 아주 큰 죄인이 회개할 때, 항상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행동하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회개할 필요”를 가지지 않으며, 큰 죄인처럼 삶의 큰 변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의 의례적인 회개보다 기쁨은 더욱 크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이라는 비유 언어는 청중들을 안심시키는 칭찬인 동시에 그들의 가면을 벗기는 목소리임이 분명하다. 이 파격은 신적 자유를 제한하려는 어떠한 인간의 노력도 거절한다는 주님의 의지다.
사실상 여러 번 회개하기 전에 큰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회개한 후엔 더욱 뛰어나게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그 예인데 주님은 그를 통하여 크게 “영광 받으셨다”(갈 1:24). 많은 용서함 받은 자가 더욱 많이 사랑할 것이며 그것은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도 늘 가지고 즐기던 것을 항상 그대로 유지하는 것보다, 잃어버렸다 찾을 때 더욱 기쁨을 느낀다.
늘 건강한 것보다 아팠다가 건강을 되찾을 때 더욱 기쁜 것도 그러하다. 그것은 마치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다. 늘 꾸준한 신앙생활도 그 자체로 귀중한 것이지만, 악한 길과 죄된 생활에서 급격히 돌이켜서 새 생활하는 것이 더욱 놀라운 즐거움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렇게 죄인들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기쁨”이 큰데, 이러한 하늘의 뜻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방해하며 분노하고,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 감사할 일을 하시는 그리스도에게 격분을 하고 있었다.
4.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주님처럼 기뻐하는 사람이 되라!!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 사는 생활로서는 제일 가치 있고 지혜 있는 생활이다. 우리가 많은 재물(財物)을 들여서 복음 사업을 하는 것, 또 자기가 몸을 바쳐서 희생해서 수고를 하는 것, 또 자기 생명을 바쳐서 제물이 돼지는 것, 그런 것 다 귀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비유에서는 그 모든 것보다 한 죄인이 회개하는 그것이 하늘에서는 제일 기쁨인 것을 여기에 발표했다.
이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주님이신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보다 더는 가치 있는 일이 없고 우리가 원하는 일이 없는데 이렇게 우리를 대속하신 지극히 크신, 주님이시며 우리의 주가 되시는 우리 주님을 우리가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이 수없이 있지만 그 모든 것보다 기뻐하시는 것 하나 있는 것을 여기에 말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할 것이 있으면 먼주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아울러 우리 주변에 아직도 주님과 요원(遙遠)한 상태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속상하게 하는 많은 지체들이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일에 주님과 같은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찾아나서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이렇게 하여 한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누가 힘써서 돌아오든지) 주님과 같이 진정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환영하고 잔치를 베푸는 자들이 되도록 하라!! 아멘!!!
그리하여 우리 진광교회로 돌아와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생애에서 가장 기쁘고, 감사하고, 만족하고, 행복하고, 기억에 남는 일들이 되도록 도와주는 자가 되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