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울 때 주의할 것

2010.11.04 18:00

윤봉원 조회 수:732 추천:81

단 1:14-202010102402날자: 2010년 10월 24일 주일오후
제목: 배울 때 주의할 것
본문: 다니엘 1장 14절∼20절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왕의 명한바 그들을 불러 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데리고 느부갓네살 앞으로 들어갔더니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1. 건강, 돈, 지식 등은 많은 것이 좋을까? 적은 것이 좋을까?
사울의 적당한 순종, 자기중심적인 사욕의 순종, 인본주의적인 순종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기신다고 하셨지요? 점치는 것과 같고, 우상 숭배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가증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즉시 순종, 온전한 순종을 하여야 한다.
우리는 평생을 배우며 살아간다. 특별히 성경 말씀과 진리를 배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날 중에 가장 귀한 날은 주일날이요, 시간 중에 가장 귀한 시간은 예배 시간으로 본다.” 그런데 성경을 배우는 것은 많이 배우면 무조건 좋을까요? 돈은 많이 있는 것이 좋습니까? 적게 있는 것이 좋습니까? 건강은 건강한 것이 좋을까요? 건강치 못한 것이 좋을까요? 만약 건강한 것이 좋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크로스비 여사나 헬렌켈러 같은 이들에게 시력과 청각을 주지 않았을까요? 능력이 없어서 안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가는데 있어서는 건강이 없는 것이 더욱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그런 형편을 주신 것으로 보이다. 아멘!!!
그래서 무엇이든지 많은 것이 좋은지 적은 것이 좋은지 그것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도 모른다.”가 정답이 아닐까요? 각자 사람에 따라서 유익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배움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살펴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다니엘이 다른 사람보다 지혜와 총명이 10배나 뛰어날 수 있었던 비결은?
 주전 605년, 이제 막 세력이 왕성하게 일어나던(興起)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갈그미스에서 애굽군을 물리치고 유다를 병합하기 시작하였다(1절). 이 사건이 얼마나 큰 공포를 자아냈는지는 하박국 1장에 잘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승리를 허용하심으로써 친히 불의를 격려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이 책 저자는 여호와께서 역사를 지배하고 계시다고 단정하며(2절; 참조, 9,17절),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이방 신들을 경배하는 땅에서 어떻게 살아나갔으며,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거룩한 기구들이 어떻게 욕되게 다루어졌는지를 기록하고 싶어한다.
이 사람들 가운데 본문에 소개되는 소년들은 자기 종교와 문화로부터 철저히 단절된 채 이스라엘과는 전혀 양립할 수 없는 이념을 지닌 갈대아의 학문과 방언(설형문자)으로 집중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심지어 이름까지 바뀌었다. 왕은 그들에게 자기가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게 함으로써 왕족처럼 대우하였다. 자기의 신앙에 따라 행동할 여지가 도무지 없는 상황이었으나, 다니엘은 양심의 자유를 얻으려는 결심을 하였다. 그는 왕의 진수성찬으로 자신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좋은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하고 채소로 만든 간단한 음식을 택하였다. 이렇게 “부수입”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에 따른 속박을 피하였다(비교, 11:26; 시 41:9; 요 13장).
그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그 소년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음식을 먹고 더 윤택해졌으며, 왕 앞에서 다른 소년들과 치른 시험에서 그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무려 열 배나 탁월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2, 9, 17절).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일하셨을까? 그것은 다니엘이 인간적인 지식과 방법(“부수입”)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뜻대로 양심을 따라서 온전히 순종하면서 배웠기 때문이다.
3. 우리가 주의할 것
3.1. 세상 지식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분명한 구별
배움에 대해서 몇 가지 주의를 우리가 배우겠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입히셔서 그 은혜 입은 표적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이렇게까지 되는 그 순서는 그 밑에 성경에 기록된 것을 참고하면 깨닫게 될 것이다. 배움에 대해서 첫째로, 배움에 대해서, 사람의 지식 두 가지를 우리가 세상에서 배우고 있다. 그 하나는 물리에 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다. 사람에 대한 지식은 윤리, 도덕, 정사, 모든 이종교 그런 것들이다. 이것은 다 세상이 가진 세상 지식이다.
이 세상 지식이 이 두 가지인데, 물리에 대한 지식은 참되고 사람에 대한 지식은 전혀 거짓말이다. 악령이 이 물리에 대한 지식을 정확하게 삣고 광대하게 연구를 시켜서 점점 이 지식이 더해 가도록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세상 지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세상 지식은 반은 참이요 반은 거짓이다. 그들이 목적하는 것은 반인 참으로 완전 거짓말을 사람들에게 인정시켜서 유혹케 하려는 것이 사탄의 욕망인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반 거짓말로서 타락한 불택자, 또는 택자 속에 있는 옛사람에게 유혹의 목적으로 역사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 지혜를 주어서 이렇게 하도록 하신 것이나 피조물 범위 내에서는 뱀이 주동돼 가지고 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서 배울 때에 신구약 성경의 도리 외에 인간에 대해서, 윤리나 도덕이나 정사나 모든 종교에 대해서 말한 것은 전혀 거짓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있는 지식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다 그것은 사람을 멸망케 하려는 뱀의 지식이다.
'뱀의 지식은 듣기 싫다. 우리는 그 지식으로 듣기 싫다.' 하는 말을 안할지라도 속으로 '저거는 뱀의 지식이니 미혹시키는 지식이니까, 이것은 유혹시키는 지식이니' 그렇게 정죄해 놓고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주신 선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에 이용물로 삼을지언정 내가 그대로의 살거나 그대로의 행동하거나 거기에 복종할 그 지식은 아니고, 내가 살아야 할 지식과 복종해야 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 이것만이 사람에 대해서 참된 지식이기 때문에 이 지식에는 나는 복종하고 이대로 나는 생활 법칙을 삼겠다 하는 것을 우리가 단단히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3.2. 새사람으로 배우지 않고 옛사람으로 배우는 것.
하나님의 지식인 성경에서 두 가지를 배우는 것이 있다. 성경에서 두 가지를 배울 때에 새사람이 배우는 것이 있고 옛사람이 배우는 것이 있다.
옛사람이 성경에서 배우는 것은 성경의 지식을 배웁니다. 또 하나 배우는 것은 성경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확무오한 말씀이지만 배우는 그 자체인 주관이 옛사람이기 때문에 배움의 결과는 옳은 배움이 되지를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외식이 지식이 되고 옛사람의 지식이 되고 옛사람의 행위가 되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5절 이하에 보면 거기에 외식을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일이 있다. 그 외식은 다 성경대로의 하는 일이요 성경을 근거한 행위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화(禍) 받으리라고 정죄하신 것은 그들이 보고 믿는 구약 성경이 틀려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들 자체가 새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은 옛사람이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깨닫고 성경에 행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 주인이 옛사람인고로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에 복종하지 안하고 이 말씀을 자아의 그 주관이 비판해서 하나님의 성경 말씀은 저들에게 비판과 심판을 받아서 취사선택을 당하게 되는 이런 성경 지식을 가지고 행동도 그와 같이하기 때문에 그것은 다 외식의 행동이요 옛사람의 행동인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요한복음 5장 9절과 10절에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나은 날은 안식일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요 자존의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다 이렇게 저렇게 내놨는데,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고쳤다고, 또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 저희들이 성경대로 하는 그 법칙을 예수님이 어겼다고 해 가지고 정죄해서 이것이 근거가 돼서 십자가에 못을 박았던 것이다.
요한 계시 17장 2절 이하에 보면 음행의 포도주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반 거짓말, 물리와 인간에 대한 지식 이 두 가지, 곧 세상 지식, 뱀의 지식 이것을 가리켜서 음행의 포도주라 그렇게 성경에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새사람이 그 지식을 가질 때에 믿음으로 가지면 하나님의 선물이 한다. 뱀의 지식도 믿음으로 가지면 하나님의 선물이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세상 지식도 하나님에게 순종으로, 순종하기 위해서, 밥하라고 명하면 밥하고 노동일 하라고 하면 노동일 하고 또 뱀의 지식을 네가 듣고 배우라면 배우고, 하나님 그분에게 속해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뱀의 지식을 접하고 받았다면 그는 선물로 얼마든지 잘 유익 되게 활용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3.3. 영감의 깨달음을 배우도록 힘써라.
셋째로는, 성경 안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자가 두 가지 배우는 것 있다. 대속을 입은 자가 배우지, 대속 입는 것이 이것이 중요하지 대속을 입지 안하면 바른 것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대속을 입은 자들이 두 가지 배우는데 하나는 영감의 깨달음을 배우게 한다. 영감을 배우게 한다. 성경을 공부할 때에 문서를, 그 문서를 옛사람이 보고 깨닫는 것과 새사람이 보고 깨닫는 것은 정반대이다. 옛사람이 보고 깨닫는 것은 옛사람 저에게 좋도록 제가 무성하고 부강해지도록 깨닫는 것이고, 새사람이 깨닫는 것은 새사람이 좋고 새사람에게 부강해지도록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정반대이다. 이래서, 새사람이 되면 성경을 신본으로 깨닫게 되고 옛사람이 되면 성경을 인본으로 깨닫게 한다.
요새 주일학교 학생들 설교할 때에 동화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그거 뱀의 설교이다. 그거 뱀의 설교이다. 우리 서부 교회 주일학교에 대해서 시찰하러 온 교회가 아마 한 사오백 교회 될 것이다. 되는데, 올 때마다 내가 그것을 말을 합니다. 말을 해서, 그대로 가서 고친 교회들은 다 주일학교가 이 배, 적어도 삼 배 사 배 십 배 되는 그렇게 늘어 나가는 그런 교회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기에, 성경을 세상 지식과 같이 그렇게 깨달아서 인본으로 깨닫는 것을 말해서 모두 신신학이라 그렇게들 말합니다. 요새는 신신학이라는 말이 파묻히고 잘 들리지 않는다. 또 인본주의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 말은 뱀이 싫어하니까 뱀의 세력이 커지니까 차차 그에게 가리어져서 인본주의니 신신학이니 하는 것이 파묻혀서 들려지지 않는다.
인본주의는 간단하게 말하면 뱀의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그 지식을 기준해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논평해 가지고 취사 선택을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인간의 지식 물리 지식을 그것을 토대로 삼아 가지고 그와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이 지식에게 지음 받은 그 물질의 물리를 창조한, 그것들을 초월한 그것들의 원인이고 그것들을 창조한 그런 아주 고차원의 하늘에서 내려온 지식이기 때문에, 물리 지식이 감히 우러러 볼 수 없는 아주 고차원의 지식이기 때문에, 백 미터 올라간 사람이 천 미터 이상의 상상의 광경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 계시 지식은 새사람이라야 습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새사람은 무엇인데 그런가? 새사람은 주님의 피공로와 성경과 진리로 살아난 새사람이기 때문에 근본 거기에서 나온 사람이요 그 사람으로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의 성질과 꼭 같은데 자기가 아직까지 유치해서 미달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그는 동질이기 때문에 즉시 받아서 다 습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새사람이 되면 성경을 읽는 데에 영감의 가르침을 받게 한다. 영감의 가르침을 받게 되고, 새사람이 아니면 뱀의 지식의 가르침을 받아서 언제든지 성경을 알고 연구한다고 해도 뱀의 지식을 근거해서 거기에 맞도록 하기 때문에 그것은 다 합리적인 해석이요 과학적인 해석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영감의 계시로 해석하는 계시적인 해석인 것이다. 영감의 깨달음을 그 사람이 배우게 한다.
그래서, 여기서 여러분들은 영감의 깨달음을 배울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종별 선택의 능을 배웁니다. 종별 선택의 능을 배운다 그 말은 자기가 현실을 당할 때에 이 성구를 내가 지금은 복종해야 하느냐 저 성구를 복종해야 하느냐, 자기 현실에서 자기가 복종해야 할 그 성구를 선택할 줄 알게 한다. 그것을 가리켜서 요한일서에는 “네 안에 기름 부음이 너를 옳고 바르게 참되게 가르치나니 기다리고 있어라.” 그렇게 말씀하신, 영감이 어떻게 행동할 것을 가르쳐 주심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새사람이 권능을 받아서 사는 이것이다.
거기 참고하려고 하면 사도행전 1장 4절과 5절과 8절에 보면 권능이, “성령이 너에게 임하면 권능을 얻어서 증인 자격을 갖추게 된다.” 그렇게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16장 17절에는 보면 “이는 혈육이 너에게 알게 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은 “세상 지식이 너를 알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게 한 것이라”하는 그 말씀, 곧 성령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그 가르침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에게 배우려고 하는 것보다도 주님에게 직접 배우려는 그것을 목표로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가르쳐도 주님이 사람을 통해서 가르치는 가르침이 있고, 뱀이 사람을 통해서 가르치는 가르침이 있으니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다 죽고 말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54절에도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그 속에 생명이 있다.” 하는 그것이 곧 새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과 연결이 있다는 말이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이 있어서 성경도 깨닫게 하시고 또 행할 것도 알게 해서 행하게 되는 이것을 표준으로 삼고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세상에 다양한 지식, 즉 자기 간판을 가지고 내세워서 어떻게 하면 자기를 인기를 끌까? 어떻게 하면 자기를 좀 알아줄까? 이래서 순전히 섞인 것 없는 자기로서 똘똘 뭉친 강한 자기, 자기 위주 주관 자기중심 이런 것에서 나오는 그 해독이 가득가득 찬 그 뱀의 지식을 분별하지 못하고 받아들인다면 다 죽는다.
그러기에, 그런 것이 오면 호소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지식을 받기 싫다고 그렇게 호소하는 일을 해야 한다. 물론 소수보다 다수가 좋은 것이지만 다수보다는 진리가 크고 하나님이 큽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 표준을 두고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3.4. 성령의 지시를 따라 살아가라.
넷째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안에 있는 새사람이,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그 새사람이 두 가지 받는 것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하나님의 영, 그 영의 지시를 받는 것이다. 그 영의 지시를 받는 일이 있다. 이래서, 요한복음 12장 4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말하는 것이 내 말이 아니라 내 안에서 아버지가 일하시는 그 일이 내 말로 나온 것이다.’ 아버지의 지시를 받은 것을 말했다. 또 내가 스스로 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
또, 요한복음 6장 57절에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라.’ 그 말은, 나로 말미암아 산다 그 말은 “주를 위해서 산다.”는 말이 아니다. 주님이 속에 능동돼서 그분에게 피동되어 산다 그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렇게 새사람으로 성신의 감화의 가르침을 받고 또 성령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하는 그 행위 종류 선택을 받아서 살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애써 나가면 나중에는 저가 그리스도의 대속 안에 있는 새사람이 되어서 두 가지 귀한 것을 받는 것이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것. 하나님께서 이래라 저래라. 자기가 처음에는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그분에게 복종하려고 애를 쓰는데 복종하려고 애를 쓰는 그 일을 오랫동안 해나가는 가운데에서 내가 복종하려고 애를 쓰는 게 아니라 그분이 나를 사로잡고 나를 쓰셔서 나를 지시해서 내가 그분에게 쓰이고 그분에게 피동 되는 그런 일이 이제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를 인하여 산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양식 삼아서, 예수님의 대속을 양식 삼아서 살면 어떤 사람이 되느냐? 나도 저 안에 있고, 나도 저 안에 있고 저도 내 안에 있다. 이러므로, “나를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산다.” 그 말은 제 마음대로 능동적으로 살지 안하고 주님이 자기 안에서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그분에게 피동 돼서 그분이 주장하고, 그분이 세력을 받아서 그분에게 꼼짝 못 하고 자유를 다 박탈당하고 그분이 자유 하시고 주권 가지고 그분이 주장하는 데에 그분의 뜻대로 살고 그분의 능력에 피동 되어서 산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갈라디아 2장 20절에는 보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4. 옛사람으로 배우지 말고 새사람으로 배워 진리와 영감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
우리가 모든 공부하는 것은 믿음으로 하여야 한다. 노동하는 사람은 노동 일에서 믿음을 지키고, 노동 일을 통해서 주님과 밀접하게 사귀어지고, 또 공무원 하는 사람은 공무원 사무 보면서 거기에서 주님과 밀접하게 사귀어지고, 거기에서 주님의 그 지시를 따라서 내가 움직이는 이 자리에 가다가, 마지막에는 당신이 나를 거머쥐고 당신 소원대로 나를 소원되게 해서 당신의 소원을 내 속에 넣어 줘서 그분의 소원이 내 소원이 되고 그분의 움직임이 내 움직임이 되도록 이렇게까지 되는 이것을 공부하는 공부가 돼야 하지. 여기서 세상 뱀의 지식 그것을 하나 들어서 자꾸 새것만 들어서 하려고 하면 우리도 피곤할 것이고 또 그런 것을 줄 필요가 없으므로 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일반 이 세상이 공부하는 것과 다른 세상이 모르는 공부를 해야 한다. 요한일서 3장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도 모르고 우리도 모르고,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세상이 모르고, 우리가 배운 것도 세상이 모르고, 우리가 욕망하는 것도 세상이 모르고, 우리의 실력도 세상이 모르고, 세상은 싫어하는 거, 왜? 이것은 세상을 죽이고 세상을 다 양식 삼아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환영하지 않는 것이다.
참조: 85030478.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11-04 18:0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