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라

2010.10.20 20:55

윤봉원 조회 수:758 추천:72

암 5:1-152010102033날자: 2010년 10월 20일 수밤
제목: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라
본문: 아모스 5장 1절 - 15절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저가 강한 자에게 홀연히 패망이 임하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1.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1-3)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 5:1~3)
이 희망의 빛은 얼마 전 지하 700m에서 매몰돼어 빛을 보지 못하고 생활하다가 69일 만에 구조된 광부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흑암 속에서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인육을 먹자고 합의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던 그들에게 구조 켑슐이 들어왔을 때 얼마나 환호성을 질렀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이 광부들에게 들어온 구조용 켑슐보다 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이 말씀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짓는 죄의 무거움과 그 결과에 대해 애가(哀歌)의 형식으로 경고한다. 그러나 그 파멸 속에서도 구원에 대한 희망의 빛이 엿보인다. 그 핵심은 ‘여호와를 찾으면 살리라’이다.
이 일련의 메시지들 가운데 첫 번째와 마지막 메시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마치 가족을 사별(死別)했을 때와 같이 애곡하는 이스라엘의 모습 전반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패배라는 형태를 띨 것이다(1-3, 16-17절). 이스라엘에서 징집된 군사들 가운데서 열에 아홉은 전선에서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들의 위협적인 음조는 4-15절에 나오는 권면을 위한 적절한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절망스런 상황에 빠지게 된 동기를 우리는 4:4절 이하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고집스런 불신앙을 고발한 아모스는 본문에 이르러 드디어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한다.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4:6, 8-11)는 말씀의 반복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여러 징계의 채찍을 드심으로써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되돌리려 하셨으나 그들은 끝까지 불순종함으로써 회복 불가능한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2절)라는 말씀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 심판은 매우 참담한 것이었다.
지금 이스라엘은 스스로 돌이킬 힘도 없고, 그를 구해 줄 어떤 힘도 없이 아주 난감한 신세이다. 하나님께 범죄한 결과는 이처럼 호된 절망만 안겨 준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요즘 우리의 삶에 찾아온 깊은 절망은 무엇 때문이라고 보는가? 깊이 돌아보아 회개하며, 절망 속에서도 은혜로 남겨 두신 희망의 씨앗들을 보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
2. 여호와를 찾으면 살리라(4-6, 14)
2.1.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음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암 5:4~6)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암 5:14)
파멸이 선고된 이스라엘에게 살 길을 가르쳐 주신다. 그 길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인생의 참행복과 생명이 하나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를 찾으며 엄청난 재물(財物)을 바치고, 먼 곳도 마다하지 않는 순례의 길을 행하는 순례의 길을 행하는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벧엘과 길갈은 선지자들이 예로 드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지었다(참조, 호 4:15; 9:15; 12:11). 이곳은 바알 숭배를 비롯한 많은 우상들에 대한 숭배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순례지였다. 처음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에 성소로 여기게 된 것이(참조, 창 28:10-19) 이후에 종교적인 순례지이자, 가나안의 토착 제의가 행하여지는 곳으로 타락되었다.
아울러 길갈과 벧엘은 역사적으로 종교적 정치적인 중심지였다. 더욱이 이곳은 가나안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토착민들의 생활 중심지로 자연 제의가 성행되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남북 왕조 분열 이후 이곳은 종교적 혼합주의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 이유는 민족적인 성소로서 예루살렘을 잃은 북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중심 성소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루살렘에 빼앗겼다고 생각하여 금송아지를 세우는 등 각종 우상을 들여와 자신들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제의적 공백기를 틈타서 바알을 비롯한 우상 숭배와 음란 제의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신을 사로잡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결국, 아모스의 종교 비판은 바로 불의의 도시가 되어버린 길갈과 벧엘 중심, 곧 인간 중심적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을 비판한 것이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오직 영적인 교제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제의와 그 행위는 이 영적 교제를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정욕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며, 우상 숭배를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는 길은 오직 여호와를 찾아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4절)는 형식으로 발해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마도 제사장의 어법에서 연유하는 것 같다. 제사장의 예배로의 부름은 예배는 복된 삶을 가져올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청중들을 예배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 27:8)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시 36:9)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이러한 예배로 부름의 완전한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4:4-5)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의 둔감한 모습은 심각한 의미를 갖는다. 이스라엘이 일상의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언약은 예배와 관련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생활 태도와 관련된 문제였으며, 바로 지금이 이제까지 하나님 백성이 너무도 등한시하였던 후자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킬 때였다. 사실 예배만으로는 절대적으로 해로운 것이며 영적으로 절름발이 신앙일 뿐이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만이 살길인데, 나는 어떻게 찾고 있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그럴듯해 보이는 종교적인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곧 살길이다(14절). 지금까지 내가 의지하던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를 폐허로 만드시면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이 말씀의 호소를 우리는 새겨 듣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야 한다.
2.2. 하나님의 권능을 믿으므로.
아모스는 공동체의 삶 가운데서 언약이 요구하고 있는 삶의 기준들을 수행해 내지 못한 중대한 잘못을 드러낸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암 5:6-7)
‘공법’은 “공의, 심판, 법령”을 의미한다. ‘인진’은 “쓴 쑥”(wormwood), 즉 “소태”를 가리킨다. 이들은 공평을 뒤엎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이었다. 나라의 재판정에서는 입에서 욕지거리가 날 정도로 편파적이고 불공평한 판결들이 내려졌다. 공의는 영예로운 대좌(臺座)에서 굴러떨어져 파괴되어 있었다. 마음과 행실에 변화가 없다면 하나님의 불붙는 진노는 그들을 태울 것이었다.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저가 강한 자에게 홀연히 패망이 임하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암 5:8-9)
이 송영(참조. 4:13)은 하나님의 권능을 송축하며 인간의 역사와 자연계에 그 위대함을 드러내시는 여호와께 영광을 돌린다. 여기에 우리가 경외하여야 마땅한 하나님이 계시다. 말 그대로 공허한 예배를 성토하는 문맥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 송영들은 아모스의 세대가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을 보충이라도 하려는 듯이 가슴 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으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한다.
하나님은 온 주우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는 뜻에 따라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약한 자를 강하게 세우시며, 강한 자의 위세를 하루아침에 캄캄한 어둠으로 바꾸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찾는 자만이 노여움에서 은총으로, 심판의 형벌에서 구원의 생명으로 변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높고 위대하신 이름,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아야 한다.
2.3. 불의를 버리고 정직하게 살아가라!!(10-14)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암 5:10)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암 5:11)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암 5:12)
이 10, 12절은 7절을 더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10)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그들의 역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들의 삶의 방향은 오직 모세의 율법에서 정해져 왔다. 그러나 물질적인 부와 정치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기 시작하였다. 그 증거를 든다면 이스라엘의 성문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재판을 거행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싫어한다는 것은(10절) 곧 그들을 책하는 바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인간의 본성을 버리기를 원하며, 선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악한 시대는 그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10). 이스라엘은 정직한 자를 싫어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진실해야 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점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일삼는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나 그만한 희생과 인내를 욕하므로 악한 시대는 진실을 거부한다. 그러나 진실을 상실한 사람은 곧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임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들의 모습과 동일한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직 정직한 자만이 주 앞에 나갈 수 있다.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 (시 140:13)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11),
이스라엘은 야곱을 공동 조상으로 가진 형제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웃을 사랑하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명령하였다(참조, 출 22:22). 그러나 악한 이스라엘은 가난한 이웃을 짓밟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재물을 위하여 사랑을 버리고 서로 반목 질시한 것이다. 모두 재물을 형제 우애 위에 둠으로써 생긴 결과이다.
11절 하반절은 그 결과를 예고한다. 생산치 못할 것이라는 두 번의 저주. 영혼의 안식처를 잃어버리게 되고 재물조차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것은 아모스가 종교적인 악을 도덕적 견지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선을 구하는 것이다. 종교가 오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臨在)의 열쇠는 종교가 아니라 공의 여야 했다. 도덕적 가격표들이 그 가격에 해당하는 품목에 다시 제대로 붙여져야 했다. 그러한 개혁만 있다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인가? 아모스는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죄악에 빠져버린 깊이가 너무 깊었기 때문에 이미 때가 너무 늦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4)
이스라엘이 파멸하게 된 것은 성문에서 불의한 재판을 할 만큼 부정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도 의롭게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서 깊고도 처절한 통곡이 터져 나올만큼 심각한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 서러운 울음을 울부짖기 전에 지금 회개의 울음을 울고, 매 순간 힘써 정직하게 살아가라!!
3. 어떤 절망에서도 불의를 버리고(회개하고) 하나님을 찾고, 뜻대로 정직하게 살아가라!!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악하게 살았던 결과로 말미암아 어떤 절망 속에 처하더라도 말씀을 통하여 희망의 빛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지금까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이론적인 신앙, 지식적인 신앙, 외식적인 신앙을 버려야 한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제일순위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와 영감을 따라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공의를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도 입을 수 있음을 아모스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훈해 준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세 가지 우선적인 것들은 아모스가 생각하는 바와 아주 잘 부합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 5:14)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5)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 그럼에도 계속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죽으리라! 심판을 면하지 못하리라!!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10-20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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