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1-102010090130날자: 2010년 9월 1일 수새
제목: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아도니야(열왕기상 1:1-10)
본문: 열왕기상 1장 1절 - 10절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그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저로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니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에서 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 문맥 구조.
1. 사건의 첫 번째 배경: 왕 직을 더 이상 수행 할 수 없는 다윗의 모습(1:1-4)
(1) 도입: …늙으니…(1)
(2) 제안: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2)
(3) 실행: …아비삭을 얻어…시중들었으나…(3-4)
2. 사건의 두 번째 배경: 후계자처럼 행동해도 아도니야를 꾸짖지 않았던 다윗(1:5-6)
(1) 아도니야의 후계자와 같은 행동(5)
(2) 아도니야를 꾸짖지 않는 다윗(6)
3. 사건: 동조자들과 지지자들을 초청하여 왕처럼 행동하는 아도니야(7-10)
(1) 아도니야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7-8)
(2) 초정 받은 자들과 초청받지 못한 자들(9-10)
1. 살처럼 빠른 인생의 무상함(1-4)
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었는데도 후계자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에 의해 살해 되었고(삼하 13:28-29), 둘째 길르압은 출생 기록 외에 더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힘이 미약했거나, 일찍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삼하 3:3). 셋째 압살롬은 반란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삼하 18:14-15). 순서대로라면 당연히 넷째 아도니야(압살롬의 배다른 형제요, 솔로몬과도 배다른 형제이다.) 이 되는 것이 옳다. 또한, 본문도 아도니야를 후하게 평가한다. 아도니야는 용모가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6a절), 다윗의 총애를 받았으며(6b절), 군대장관 요압이나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지지를 이끌어 낼 만큼 정치적 수완도 뛰어났다(7절). 이와 같은 역사적인 정황은 다윗의 대를 이을 다음 왕이 아도니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의 편에 서서 이점을 단죄(斷罪)한다.
‘나이가 많아 늙으니’ 다윗은 30세에 왕이 된 후(삼하 5:4-5)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 도합 40년간 왕좌에 있었으므로(왕상 2:11; 대상 29:27). 본문의 그의 나이는 70세 정도로 추정된다.
다윗이 한때는 골리앗을 이긴 맹장이었다. 이스라엘을 통일한 위대한 왕 다윗도 혼자서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에 이르는 때가 찾아왔다. 칠순을 넘긴 늙은 왕에게는 이불로도 몸의 온기를 회복할 수 없어서 젊고 아름다운 여인 아비삭의 품을 의지해야 했다. ‘수넴 여자 아비삭’ 젊은이의 온기를 받아 늙은 몸의 기운을 회복하는 방법은 고대의 치료 방법의 하나였다는 견해가 있다. 수넴 여자 아비삭도 젊은 날의 생기를 다윗에게 돌려주지 못했다. 병약해진 왕 다윗에게서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의 모습을 더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무너지는 몸 앞에서 왕이라는 지위마저 너무 초라해 보인다. 하나님의 복과 번영을 전하던 왕이 이제는 나라에 부담과 위기를 안겨 준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왕은 어떤 경우든 인간적인 조건을 의지해서는 안 되었다.
지금 손에 쥔 것들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늙고 병든 다윗 왕을 통하여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본문의 다윗과 같은 인생의 황혼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내가 가진 재물, 지식, 악착같이 챙기는 건강도 모두 내어 놓아야 할 때가 있다. 다 내어 놓고 없어질 것은 영원한 것으로 바꾸고 옮기는 데 사용하는 주인공이 되도록 힘쓰자.
또 한 편으로는 아비삭을 다윗에게 붙여 주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아비삭과 같은 도와줄 사람을 붙여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더 늙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충성스럽게 이루어 드리는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2. 아도니야가 품고 있었던 잘못된 소망(5-6)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니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왕상 1:5-6)
아도니야는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였다. 이것은 ‘자기 앞에 다니는 사람’으로 직역할 수 있다. 이렇게 호위병을 두는 것은 권위의 표시였다. 이것은 압살롬의 경우에도 볼 수 있었다.
‘이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 오십 명을 세우니라 (삼하 15:1)
아니니야는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묻지도 않고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섰다. 그는 넷째 아들이었지만 장자와 같았던 아도니야는 아버지 다윗을 배신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 했다. 이렇게 아버지를 무시하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데는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고 키운 두윗에게 책임이 있음을 성경은 지적해 준다.
두 아들(암논과 압살롬)의 비명횡사(非命橫死)를 지켜본 아버지였기에 형들 못지않게 훌륭한 모습으로 자라준 아도니야는 다윗의 큰 기쁨이며 자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다윗은 ‘아도니야를 꾸짖지도 않고,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참조, 표준 새번역의 6절, 개역개정판에서 ‘한 번도’를 ‘평생에’라고 난외주에 표기).
본문의 분위기상 아도니야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왕위 즉위식에 해당되는 희생 제사도 드리기 전부터 마치 자신이 왕이 될 것처럼 행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표준새번역 성경을 인용하자면, ‘그런데도 그의 아버지 다윗은’ 아도니야를 제제하지 않았다. 본문 6절은 아도니야에게 잘못된 희망을 품게 하였던 중요한 원인제공자가 다윗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6절은 다윗이 왕위 계승과 관련된 그의 행동을 묵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성경은 사울(삼상 9:2)과 압사롬(삼하 14:25)의 몰락을 통하여 인간적으로 훌륭한 조건이 꼭 하나님 나라의 성공 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윗이 아버지로서 잘못된 훈육방식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조건 없는 용납이 아니라는 점을 본문을 통해서 명심하자. 잘못된 자녀를 섭섭하게 하지 않으려고 매를 들지 않았을 때 아도니야처럼 부모를 언제 어떻게 섭섭하게 할지 모른다.
잘못을 책망하는 것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 22:15)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잠 23:13)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잠 23:14)
떠받들며 키운 자식은 인간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를 떠받드는 법을 알기 어렵다.
3. 동조한 사람들과 거부한 사람들(7-8)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왕상 1:7-8)
다윗과 함께 전장에서 일생을 보냈던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에게 동조하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군사, 종교 분야에서 최고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다윗의 그늘에서 요직을 맡았던 신하들과 솔로몬을 제외한 다른 왕자들도 아도니야의 위세에 눌려 마치 왕위 즉위식과 같은 잔치 초대를 거부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보니 그 말이 생각난다. 왕의 정승 개가 죽었을 때는 조문객이 많았으나 정작 정승이 죽으니 조문객이 오지 않았다는 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언제 떠날지 모르는 자들이다. 지금 관계를 맺고 있을 때 믿음 안에서 서로 교제하며 협력하여 주님의 참 제자로 세워지는 수입만 보도록 하자.
그러나 성경은 대세가 아도니야에게 기우는 것처럼 보였으나, 대세를 거슬러 아도니야와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동시에 말한다. 이 두부류의 사람들의 차이(差異)가 무엇인지 본문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5-10절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아도니야의 훌륭한 외모와 수완이 지도자를 결정 하는데 상당부분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도니야의 동조자들은 그 사람의 중심보다는, 그가 가진 현재의 권력과 외모 등을 더 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자칫 잘못 하면 아도니야와 같은 사람에게 동조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분별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지도자가 될 사람의 외모나 언변 등을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질서를 거슬러 사람들을 선동하고, 분열을 조장하고, 진리를 외면해도 그들의 외모와 언변에 빠져 바른길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없도록 항상 성령 충만하고 깨어 있는 자가 되자.
따라서 우리는 유력한 사람들과 잘 사귀기보다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과 잘 사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4. 아노니야가 청한 자와 청하지 않은 자(9-10)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에서 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왕상 1:9-10)
아도니야는 동물을 잡고 자기를 지지하는 자들만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여기서 동물을 잡아 제사를 바치는 것은 새로운 임금의 즉위식에 동반되는 종교 행위였다. 개역성경은 단순히 잔치를 위한 도살로 기록하고 있지만 여러 역본들(참조, 공동번역, NRSV, NIV 등)은 ‘sacrificed sheep and oxen’으로 번역하여 아도니야의 행동이 왕의 즉위식에 동반되는 종교적 행위였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제사에 곁들인 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한 것은 임금의 자격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청함 받은 자들이 자기가 얻는 것이 있고 먹을 것이 있는 동안만 지지한다는 것을 몰랐다.
우리도 우리 욕심 때문에 우리의 관심과 사랑의 잔치에서 거절당한 사람은 없는가 돌아보자.
5. 오늘 하루 말씀 적용하기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아도니야처럼 하나님과 부모(믿음의 부모든 육신의 부모든)를 무시하고 스스로 높아지려고 행동하는 교만한 자가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소망이 아닌 것을 추구하여 아무리 무엇을 성취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이다.
우리는 부모가 자녀를 양육함에서 다윗을 거울삼아 성경적으로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잘못은 책망하고, 성경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서 자녀가 성경적인 가치관을 정립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 이 일은 성령님이 해 주셔야 한다.
우리 주변 사람이 동참을 요청할 때 그들의 요청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위한 것인지 자기 욕심 성취를 위한 것인지 정확히 분별하여 동참 여부를 결정하여야 한다. 우리는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하지 합력하여 악(惡)을 이루는 자가 되어서야 하겠는가?
우리의 욕심이라는 기준을 따라서 사람들을 편애하고 무시하는 악을 저지르지 말자.
오늘 우리 세대에 아도니야와 같은 지도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기쁘게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의 지도자가 세워지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자.
참조. 박희정 목사의 성경묵상; 정태현, 「열왕기상․하」, p. 27; 매일성경 2010․9․10.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09-01 1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