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6:11-142010070402날자: 2010년 7월 4일 주일오후
제목: 십자가만 자랑하라
본문: 갈라디아서 6장 11절 - 14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 우리가 지금까지 자랑한 것은 무엇이었나?
우리 자신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을 자랑했나 돌아보자. 건강, 미, 자식, 공부, 출신학교, 실력, 가정 형편, 교회, 배경, 과거 자랑(“나도 한 때는 잘나갔었다니까?”), 미래 자랑(“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될 것이다.”) 등 다양한 것을 자랑하며 살아왔다. 또한, 미래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자랑하며 살아왔는가? 지혜자의 말을 들어보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 27:1)
그렇다면 이러한 자랑이 우리가 자랑할 것인지 아닌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찾아보고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자랑, 하나님께서 하기를 원하는 자랑만 하는 자들이 되어야겠다.
2. 거짓 선생들의 정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 대한 그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대필을 하지 않고 친히 큰 글자로 썼다. 바울은 그의 관심을 강조하기 위해 ‘큰 글자’로 마지막 권고와 인사를 하면서 대적자들을 비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한다. 바울은 이미 복음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한 바 있다(참조, 갈 5:6).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재차 거짓 선생들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편지를 마무리 지을 수 없었던 이유는 순전히 그들에 대한 바울 자신의 애정 때문이었다.
거짓 선생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었다(12절). 그들은 종교의 형식에는 매우 열성적이었지만 참된 경건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었으며 스스로 율법도 지키지 아니하였다. 때때로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에 열심인 사람들이 종교의 본질에 관해서는 가장 문외한인 것을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억지로 이방인 개종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도록 하였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그들은 안일한 생활을 하고 또 세상적인 재물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자기 자신들의 믿음과 양심이 파탄된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에 열심을 품기보다 세상적인 목적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할례받기를 원했던 이유는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육체를 자랑하려 함’이었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종교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종교이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은 외적인 행위에 관심의 초점을 두었다(12절).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대주의자들은 할례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인 것처럼 강조하며 거기에 그들의 관심의 초점을 두었다. 사도행전 15:1을 보면 유대의 거짓 교사들은 ‘너희가…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가르쳤다. 이들은 복음의 진수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부정한 것이다. 이처럼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가장 중요한 차원으로 끌어올려 종교의 핵심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할례는 조그마한 외면적 수술에 불과하며, 구원을 확보해 주는 필수 조건은 아니다. 할례는 계약 백성의 징표로써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대저…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8, 29)고 했다. 기독교는 이렇게 신앙의 내면을 강조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심령의 변화는 제쳐 두고 육신적인 의식에만 치우친 나머지 행위와 의식만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는 언제나 내면을 더 중요하게 본다.
3. 바울이 십자가만 자랑한 이유
3.1.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한 것
바울은 우리에게 그의 성품과 행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유일한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절)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헬리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유대화된 선생들 자신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일과 구원에 필요한 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혼합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자랑하였으며, 십자가 외엔 그 어떤 사상이라도 혐오하고 거부하였다.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절)라고 분명히 고백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지닌 소망의 근거를 나타낸다. 그가 십자가를 자랑한다 함으로 그 어떤 시련이 그에게 올지라도 그는 그 시련을 받아들이며 그 시련 가운데서 기뻐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 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을까?
바울은 본 서신에서뿐만 아니라 로마서에도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생각들을 파헤쳐 완전히 분쇄해 버렸다(참조, 롬 4:9-12). 갈보리의 십자가를 찾기 전까지 인간은 모두 자기 과대망상(誇大妄想)과 자기 의(義)에 사로잡혀 있었다. 개종하기 전 바울도 그러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그가 발견한 자신의 모습은 죄인의 모습이요, 추하고 부패한 모습이었다. 자기 의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와같이 우리도 십자가 밑에서만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그러한 모습이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죄인이요, 악한 자신의 모습이 십자가로 낱낱이 드러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를 피하고 자신의 외적인 모습, 행위만을 내세우며 그것을 자랑한다(13절). 신앙이 ‘유대주의 화’되는 것이다.
바울은 많은 학식과 세상적인 자랑거리들을 모두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참조, 빌 3:8). 그에게 인간적인 강점이나 남보다 특출난 면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보다 십자가를 자랑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성도의 모습이다. 재산, 학식, 명예보다는 자신 구원의 근간이 된 십자가를 제일 먼저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를 자랑하려면 먼저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만 한다(참조, 갈 2:20). 자신의 모든 욕심을 채우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과 의롭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는 큰 상급까지 받게 될 성도들이 십자가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세상적인 욕심을 충족하려 한다면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가 됨을 명심해야 하겠다(참조, 갈 5:17).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바르게 재정립해야 한다. 십자가 아래서 추악하고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고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악한 욕망만을 생산해 내는 우리의 내면세계(內面世界)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다스려야 한다.
3.2.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 절). 이 구절은 바울의 고백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과거에 율법에 대한 열심히 진리를 배격하고 주의 성도들을 수없이 핍박했지만, 주님을 만난 후로는 스스로 세상과 단절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성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 죄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고, 또한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세상과의 근본적인 단절이 없이는 성령의 소욕대로 살 수 없으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받지 못하게 된다. 성도들은 비록 그 육신이 지상에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분명 그의 주소, 그가 영원히 거할 처소는 하늘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육신의 정욕대로 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즐기면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수는 없다. 과감하게 자신의 옛 모습을 죽여야만 한다. 썩어질 소망, 아무런 가치 없는 정욕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정녕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형벌을 사양치 않으셨다. 그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다. 우리의 영원한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이 되어 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의 혈통을 자랑하지 않았다. 신분, 학벌을 자랑하지 않았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전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로마인에게는 수치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만을 전했다.
우리 또한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기에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3.3. 십자가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무기가 되기 때문에!
십자가는 성도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이 된다. 성도들은 십자가로써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고 환란을 이길 수 있다. 그것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성도들이 믿음을 키우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증 받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십자가는 죄로부터의 구원과 함께 세상의 환란과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보증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의 자랑은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여야 한다.
4. 십자가외에 것을 자랑했던 것을 회개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아가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아야 한다. 이러한 죄인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충만해야 한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앞으로도 십자가를 붙들 때 마귀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하여야 한다. 바울처럼 십자가를 자랑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강력히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십자가 외에 온갖 종류의 자랑을 했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하나님께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을 항상 간직하여야 한다. 앞으로의 남은 생애는 우리도 바울처럼 십자가만 자랑하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07-06 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