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2:21-322010052301날자: 2010년 5월 23일 주일오전
제목: 내게도 간절함이 있는가?
본문: 창세기 32장 21절 -32절
1. 다양한 환경을 연출하시고 작품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이 나그네 기간에 모든 상황을 연출해서 작품을 만들어 주신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기쁜 현실, 슬픈 현실, 희망적인 현실, 절망적인 현실 등 다양한 환경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람의 기쁨, 배움의 기쁨, 결혼의 기쁨, 득남의 기쁨, 사업 번창의 기쁨, 학업 성취의 기쁨, 경제적인 부요의 기쁨, 각종 실력의 자람의 기쁨, 취직의 기쁨,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슬레임 등의 살맛나는 소식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천안함 사대, 교통사고, 원수같은 이웃과 가족들, 말만 잘하고 실천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보는 괴로움, 앞날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경제적 미래, 각종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일이 내게는 닥치지 않나?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건 사고들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정의할 것은 이런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내가 잘해서, 주변 사람들 때문에 닥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 하나님 목적에 영원무궁토록 합당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도록, 하나님의 아들의 실력을 길러 가도록, 예수님의 참제자가 되도록하시기 위해서 만들어 주신 현실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맞춤의 현실로 주셨습니다. 아멘!!
2. 야곱의 선택
2.1. 자기 생각과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줄타기함.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은 20년 동안 외삼촌이요, 장인인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이했습니다. 고생 끝에 그 나름대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네 명의 아내와 더불어 열한 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그러던 야곱이 나이가 들면서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도 내 뼈는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내 아버지 이삭이 묻힌 고향땅에 묻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 땅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걱정이 있었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지난날 어머니와 짜고서 형의 장자권을 가로챈 일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판단을 근거로 계략을 세웁니다. 에서에게 미리 사절단을 보내어 에서의 마음 상태를 살피고, 타협을 시도하도록 하였습니다(32:1-6).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소식은 400인을 거느리고 자신을 죽이러 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형 에서는 그 일 이후 20년을 한결같이, 또한 하루같이 동생을 향하여 칼을 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에서가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은 동생을 용서하며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창 32:6-7)
그래서 그는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해’ 했습니다. 이때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자기 꾀를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줄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때 우리나라 말에 “정치인들은 교도소 위를 걷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유행인 적이 기억이 납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창 32:11-12)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창 32:13~16)
야곱이 에서에게 주려고 준비한 짐승의 수를 오늘날 값으로 대략 환산을 해 보았습니다.
암염소 200*400000= 80,000,000만원, 수염소 20*400000= 8,000,000원, 암양 200*400000= 80,000,000원, 수양 20*400000= 8,000,000원, 약대 30*3,000,000=90,000,000원, 암소 40*5,000,000=200,000,000원, 황소 10*6000000=60,000,000원, 암나귀 20*2000000=40,000,000원, 새끼 나귀 10*500000=5,000,000원의 합계는 대략 5억 7천만원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재산을 투자하여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한 야곱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야곱의 생각이었습니다.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창 32:20)
야곱은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시길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봉변을 당해도 좋습니다. 저의 한 가지 소원은 저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원하는 것입니다.”라고 생각과 행동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어차피 저는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못 됩니다. 하나님 아시잖아요?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오니 하나님이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2.2. 야곱이 하나님을 이김
야곱의 줄타기는 오늘 읽은 본문 21절 이하에서도 계속 되었습니다.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1~24)
야곱은 두 아내와 여종, 열한 아들은 보냈지만 자신은 얍복강을 건너지 않고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 씨름을 계속하였습니다.
“가라” “못갑니다” “가라” “못갑니다” “가라” “못갑니다” “가라” “못갑니다” 이 씨름은 밤새도록 계속 되었습니다.
이 씨름 중에 성경은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 등장합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왜 하나님이 사람을 못 이기겠습니까?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하나님을 보셨나요? 그러면 뭡니까? 하나님이 져주신 것이지요. 그러면 왜 하나님이 져주셨을까요? 그것은 야곱에게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너는 이제 누구든지 이길 수 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기도하면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을 이겼는데 그 누군들, 그 무엇인들 이기지 못하랴?”
지금 야곱이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정말 두렵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던져져 있습니다. 모든 가솔들을 보내고 외톨이로 얍복강변에 남아있습니다. 혼자 두려움과 답답함에 눌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대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의도적으로 져주십니다. 마치 아버지가 어린 아이와 팔씨름을 하면서 못이기는 척하고 저 주는 것 봤지요? 그래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그로 하여금 자신감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희망이 있으면 온 세상이 절망스러워도 희망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담대함이 있으면 온 세상이 두려움에 휩싸여도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온 세상에 슬픔의 먹구름이 덮쳐도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2.3. 야곱의 환도뼈가 박살남.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5)
이 씨름을 계속하는 동안 야곱의 계속해서 말은 안 들으니까 하나님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허벅지 관절이란 엉치뼈의 연결 부분으로서 그것이 없으면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환도 뼈가 박살이 나서 나동그라지고 말았습니다. K.O.패 되고 말았습니다. 힘이 쭉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치시면 재산도, 건강도, 지혜 지능도, 가정도, 사업도, 국가도 다 부서지고 맙니다.
이번 주간에 묵상한 본문 중에서 모압과 에돔의 지혜와 안보를 치신 하나님을 우리는 분명히 묵상했습니다.
‘모압이 여호와를 거스려 자만하였으므로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모압 거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임하나니 두려움에서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떨어지겠고 함정에서 나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내가 모압의 벌받을 해로 임하게 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48:42~44)
‘암몬 자손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이 무자하냐 상속자가 없느냐 말감이 갓을 점령하며 그 백성이 그 성읍들에 거함은 어찜이뇨 (렘 49:1)
‘바위 틈에 거하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같이 보금자리를 높이 지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49:16)
게달과 하솔을 치신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는 일어나 저 평안하고 염려 없이 거하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거하는 국민을 치라 그들의 약대들은 노략되겠고 그 많은 가축은 탈취를 당할 것이라 내가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는 자들을 사면에 흩고 그 재난을 각방에서 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솔은 시랑의 거처가 되어 영원히 황무하리니 거기 거하는 사람이나 그 중에 우거하는 아무 인자가 없게 되리라 (렘 49:31~33)
2.4. 새 이름을 얻음
야곱은 환도뼈가 박살이 난 상태에서도 날이 새어가려고 하던 그 사람을 놓아 주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6)
그 때 그 사람은 야곱에게 질문을 합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이 답합니다. “야곱이니이다”
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물으시는 것입니까? 정말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으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름의 의미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물으신 것입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하려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고 그 이름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야곱’이란 이름의 뜻은 “붙잡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 이름 그대로 살았습니다. 남이 잘 나가면 뒤에서 붙잡고 잡아당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약탈자입니다. 술수와 거짓이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이니이다.’
야곱은 지금 단순히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초라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내어놓으며 “오 하나님이여. 내가 야곱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이 고백을 하면서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그가 무엇을 붙잡았습니까? 무엇을 손안에 놓으려고 애써왔습니까? 창 32:13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새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네 명의 아내를 위시하여 11명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야곱은 그것들을 손에 쥐고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자신의 손에서, 자신의 품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놓고 싶지는 않았지만 놓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혈혈단신 혼자 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야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 32:24)
야곱은 붙잡는 인생을 살았지만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얍복강변에서 인생은 붙잡는다고 붙잡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나이 97살이 되어서야 그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필립 얀시(P. Yance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은혜란 상처와 흠집의 갈라진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같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나는 야곱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백에는 “나는 약점투성입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가장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은혜란 상처와 흠집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노출시킬 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야곱에게 새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28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스라엘! 성경에서는 그 의미를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름은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어 강하게 된 자”를 의미한다. 그 문구에는 “통치하다”를 뜻하는 동사 사라르나 “다투다, 힘을 가지다”를 뜻하는 사라가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투쟁하신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학자 폰 라드도 “이스라엘”이란 의미는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립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이 사업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다스립니다.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며, 넉다운이 되어, 땅바닥에 나뒹구는 순간에 야곱에게 찾아온 놀라운 깨달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매달려야지!
야곱은 호소합니다. “도와주세요. 이제는 당신밖에는 없습니다.” 이 매달림으로부터 삶의 변화는 시작됩니다. 환도뼈가 작살나기 전에,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우리의 몸과 경제와 사업이 박살 나기 전에 깨닫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의 육신적인 것을 의지하고 큰소리칠 때가 아니라, 자기의 한계 상황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하나님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자랑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백(back ground) 입니다.”라고 할 때 승리는 시작됩니다.
“너는 신앙인이라 하면서 하나님을 붙잡고 있느냐 아니면 아직도 세상의 것을 붙잡고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 말고 다른 것 달라고 소리치고 있지 않으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지 근성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은총 베풀어 주시기에 합당한 사람만 되면 하나님은 남김없이 넘치도록 부어주시고 채워 주십니다. 아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은 얻은 야곱은 이제까지는 자기의 지혜와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이제부터는 전적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다스림 받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 기이한 경험을 한 후 담대하게 에서를 향해 나아갑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창 33:1~4)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앞서 보내고 자기는 가지도 않았던 사람이 이제는 제일 앞서서 형 에서를 만나러 가는 사람으로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는 놀라운 삶의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형이 자신을 만나자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감격스러워하며 포옹하고 사랑을 확인하는 일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간절히 계속 기도하라!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인인관계의 문제입니까? 직장 문제입니까? 경제 문제입니까? 학업의 문제입니까? 질병 문제입니까? 아니면 장래에 대한 문제입니까? 어떤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우리 자신들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도 내 앞에 닥친 문제 해결을 위하여 야곱과 같은 간절한 기도 생활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해결 못 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야곱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자신을 변화시켜 주실 때까지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힘을 양도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나님이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문제보다 먼저 나와의 문제를 풀어라. 초점을 나에게 맞추어라. 나와의 사이에 가로막힌 것은 없는지 살펴보라. 그러면 다른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된다.”고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되면 “에서의 문제”, 즉 표면적인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괜히 엉뚱한 문제 붙잡고 시간 허비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야곱이 기도했을 때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자 눈앞에 닥쳤던 문제, ‘에서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야말로 봄 동산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형 에서와의 문제는 2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동안 풀지 못한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니 그냥 풀려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어떤 문제로 고민하십니까? 은혜 받으면 해결됩니다. 문제 자체에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을 먼저 만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앞에 산적해 있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심으로 형통하게 되는 역사를 체험하시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공 되세요.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05-25 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