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는 제자들

2010.04.02 16:15

윤봉원 조회 수:1103 추천:57

마 26:36-462010032801

날자: 2010년 3월 28일 주일오전
제목: 어이없는 제자들
본문: 마태복음 26장 36절 - 46절
1.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우리의 처세법은?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는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그러나 그런 김연아도 세계 선수권의 쇼트 프로그램에서 1등이 7등으로 내려앉은 좌절을 맛보았다. 해군 군함인 천안함은 백령도에서 좌초되었다. 그에 따라서 46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 그 외에도 각종 사건과 사고로 말미암아 귀중한 생명은 나이, 빈부, 건강의 유무, 지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잃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살아 있는 우리도 우리 개인과 가정, 교회, 국가적인 중대사를 앞두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인생을 포기해야 할까요? 자살을 하면 될까요? 멀리 여행을 떠나면 해결될까요? 아니면 일부 탈불자들처럼 사고를 고의(故意)로 치고 감옥에 들어가면 될까요?
이런 사건들을 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하고 무지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앞이 캄캄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급하게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위급한 일로 짓눌릴 때 우리가 일차적으로 표현하는 본능적 반응은 무엇입니까? “나는 부모를 잘 못 만나서 내 신세가 이렇다.”라고 부모를 비난합니까? 아니면 “자식을 잘 못 둬서 그렇다.”라고 하며 자녀들에게 탓을 돌립니까? 혹은 119에 전화를 겁니까? 112 경찰에 신고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급한 일을 앞두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번민과 염려, 혹은 죄책감으로 병들었을 때 기도가 최우선 순위 목록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위급함의 독소를 제거해 주는 것입니다. 가슴 든든한 친구와 짐을 나누는 일입니다. 특별히 문제가 있을 때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기도의 동역자를 세워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2. 두 종류의 처세
2.1. 예수님의 처세법
2.1.1.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
우리는 목숨이 살아 있는 동안은 서론적으로 제시한 것과 같이 다양한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사람들은 신앙적 관점에서 볼 때 두 종류로 처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처세법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8-39)
학자들은 보통 이 이야기 가운데서 시험에 부딪혔을 때 밤새우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권고를 찾아냅니다(막 14:32-42; 눅 22:40-46; 요 12:28-33; 13:21; 16:32). 그러나 이러한 면도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이 사건에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이제 자기가 하려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편안하게 죽음을 바라보던 예수님(16:21; 17:22-23; 20:17-19; 26:1-2)이 왜 위대한 용기를 가지고 순교당한 마카비 시대의 순교자나 또는 수많은 자기의 제자들보다 더 용기없는 태도를 보이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준 고뇌를 가볍게 생각하고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심한 번민에 빠져서 세 번씩이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는 택한 백성을 위한 대속의 희생을 위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만 이뤄지기를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마 26:42~44)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그에 대한 대답은 마태복음 안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1:21과 20:28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들이 이 예수는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희생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 언약(26-30절)과 그의 백성이 죄에서 구원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짐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신약성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독특하고도 대속적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놀랄 일이 못됩니다(롬 3:21-26; 4:25; 5:6, 9; 고전 1:23 : 고후 5:21 : 히 2:18; 4:15; 5:7-9; 벧전 2:24).
2.1.2. 고난 길, 죽음의 길인 줄 아시면서도 대속에 대한 예언을 성취를 위해서 묵묵히 걸어가신 분.
예수님은 순교를 괴로워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카비 시대의 순교자들이 26:53과 같은 말을 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수 세기에 걸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얻은 힘으로 기꺼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희생제물인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완전히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27:46)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 죽음을 향하여 묵묵히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독특한 것처럼 그의 번민도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얼마든지 말을 하실 수 있고, 권세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마 26:53-54) 말없이 묵묵히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셨습니다.
예언: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
성취: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마 26:63)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마 27:12)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이러한 주님의 희생의 걸음이 있었기에 우리가 죄사함 받고, 의인이 되었고, 영생을 소유한 자가 되었으며, 영원무궁토록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생역전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통하여 구원의 선물을 받은 우리의 최선의 응답은 그를 위한 감사함으로 무조건 예배하는 것입니다.
2.2. 어이없는 제자들의 처세법
이제 제자들의 처세법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는 명령을 전달받았습니다. 이 명령은 결코 그냥 눈만 뜨고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앞으로 내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될 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영적 배반의 길을 걸을 것을 말씀(26:31-35)하신 것입니다. 정상적이라면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이런 배신자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래서 38절의 명령은 제자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로 준비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위한 기도를 부탁한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 명령의 참뜻을 이해 못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어떤 자들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하는 중에 피곤하다는 이유로 잠만 잤습니다.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마 26:43)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해도 모자랄 즈음에 잠만 자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 26:40-41)
이 말씀은 언뜻 보면 베드로에게만 말씀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말씀은 제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한 시’는 1시간을 가리키기 보다는 예수님의 장시간 기도(16:16; 26:33-35)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은 짧은 시간도 영적 경각과 예수님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지 않고 잠을 잤던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는 “깨어 있어 잠자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보다는 오늘밤(26:31)에 그들이 영적으로 배신할 것을 예고한 대로 영적 배신을 하는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요청의 말씀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험에서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는 제자들에 대한 연민의 말씀임과 동시에 경고의 말씀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자신의 어려움보다 제자들에 대한 훨씬 더 큰 염려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있었음에도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보다 자신들 앞에 놓인 짐이 코가 석자는 되는데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잠만 자고 있는 제자들을 보았을 때 그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사 국어 사전을 한 번 찾아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자는 제자들을 보았을 때 심정을 뭐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하고.... 그런데 어이없다는 말의 의미를 찾아보니 “기가 막히다, 엄청나다, 놀랍다, 어리둥절하다, 어안이 벙벙하다, 아연(啞然)하다, 권설(卷舌)하다, 어처구니없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적합한 단어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도 어이없는 제자들이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3. 어이없는 제자들의 걸음을 걷지 말고 예수님처럼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승리하는 주인공이 되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우리를 대신한 대속의 죽음을 앞두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말없이 묵묵히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을 깊이 묵상해 봅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사활대속의 공로에 대한 감사와 기쁨, 찬송이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영적으로 무감각한 어이없는 제자들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당할 모든 상황의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는 감당할 수도 있길 수도 없는 우리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자신 스스로는 환난과 시험, 마귀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없음을 인식하고 전적 주님의 도우심의 은혜를 힘입어 승리할 수 있도록 예수님처럼 기도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인공되세요.
참조. Carson,「마태복음」, p. 627.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04-0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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