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투쟁이다

2010.03.12 20:38

윤봉원 조회 수:1087 추천:66

눅 18:1-82010031253

날자: 1956년 1월 24일 새벽
제목: 기도는 투쟁이다
본문: 누가복음 18장 1절 - 8절
1. 강청의 기도를 잘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계획을 이미 세워 놓으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을 지금까지 증거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나요? 여러 가지 자세가 있겠습니다만 지금까지 배운 것은 “부르짖는 기도를 하라!!” “전심으로 기도하라!!” “뻔뻔한 기도를 하라” “염치 불구하고 기도하라!!”고 증거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기도 생활을 잘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고 아직도 이런 기도의 생활이 되지 않는다면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것이 원인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 교회, 가정, 개인 앞에 놓여 있는 기도 제목들은 우리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인지? 아니면 우리가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것들만 있는지?
우리 교회 문제만으로 제한해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금요 기도회에 전 성도가 참석하는 문제, 새벽기도 참석 문제, 전도 문제, 인도와 양육 문제, 성전 건축과 예배당 건축 문제 등 하나하나 따져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2. 과부의 기도는 투쟁적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는 자기가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판단하기를 자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도시의 재판관에게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재판관에게 자기의 문제를 부탁했지만, 그 재판관은 처음에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투쟁적으로 계속해서, 본문에는 ‘번거롭게’ ‘괴롭게’하니 안 들어주면 더 시달리겠다 싶어서 그 재판관은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과부가 자기의 문제를 재판관이 들어줄 때까지 찾아가는 모습은 매우 투쟁적으로 보입니다. 마치 데모꾼이나 전쟁터에서 싸우는 전사 같지 않습니까?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한결같이 간구하는 모습이...
이러한 모습의 과부를 보면서 주님은 우리 기도의 자세와 응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퐌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6-8)
이렇게 부르짖는 기도, 강청의 기도, 투쟁적인 기도, 뻔뻔한 기도를 하면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말세에 이렇게 기도하는 자를 보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매우 희귀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성경에서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이렇게 투쟁적으로 기도한 사람들을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3. 투쟁적인 기도를 한 사람들
기도는 그 제목이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한 것만큼 투쟁적인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시편에 그의 기도문에 마다 원수로 더불어 투쟁하는 기도를 언제든지 계속했습니다. 찬송 외에 기도라면 원수로 더불어 싸우는 그 사실을 가지지 아니한 적은 없습니다.
창세기 32장 13절 이하에 보면 얍복강 나루에서 기도하던 그 야곱도 그는 원수를 둔 투쟁적인 기도였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자신들과 민족의 문제를 앞두고 그들은 삼일을 금식하며 투쟁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갈멜산 제단에서 엘리야의 기도도 원수를 둔 투쟁적인 기도였습니다.
사자굴을 앞둔 다니엘의 기도도 그는 원수를 둔 투쟁적인 기도였습니다. 이들은 그 원수의 강한 실력을 알고 자기의 불가능한 무능을 알고 자기와 동맹 협조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동지자를 구하여 응원을 청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청원의 기도를 할 때에 어디까지 강하게 부르짖은 그 정도는 혹은 몸에 진액이 마르기까지(다윗) 자기의 일생 살아온 모든 공로가 되는 소유를 포기하기까지 애정의 가정을 포기하기까지 자기 몸을 꺾기까지 야곱은 기도하였고, 엘리야와 다니엘 같은 사람들은 생명을 기울이기까지 하여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4. 투쟁적인 기도를 한 원인
이들이 이렇게 강하게 간구한 그 이유와 확신이 있게 된 그 원인은
자기의 가련한 상태를 하나님의 자비성으로 긍휼히 여겨 주실 줄 알아서 기도함도 아니요, 자기의 간절한 열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 혹은 녹이려 함도 아니요, 강하게 주장하여 하나님의 그 뜻을 변경시키려 함도 아니요, 벚나무와 같이 많은 말로 하나님을 유혹 혹은 설복을 시키려 함도 아니요, 다만 요한복음 15장 7절의 약속대로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과 자기의 주장과 하나되어 있는, 곧 뜻이 같고 주장이 같고 목표가 같고 입장이 같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생명과 모든 소유를 기울여 기도하여도 그 희생이 헛되지 아니할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확신과 담력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5. 발람과 같은 사욕을 위한 기도를 하지 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되지 아니한 그 뜻을 이루려고 기도하는 자는 발람의 기도의 길을 걷는 자니 그 종국은 발락을 망치고 이스라엘을 망치고 자신이 돌에 맞아 영원한 멸망의 사람이 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 아닌 자기의 사욕의 뜻을 이루려고 힘쓰는 기도는 자기의 협력자와 대립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자신을 망치는 결과를 맺는 것이니 기도의 크게 주의할 것은 이것입니다.
발람이 그 기도를 중단 혹은 피하였던들 자타를 망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기도의 응답의 능력이 있어서 그러함이 아니요, 그 기도를 하게 하는 악령의 감화에 그 본인의 인식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자기의 뜻을 조장시키는 그 계획과 각오가 점점 강하여 짐이니 자멸의 운동이 강하여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6.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루어 달라고 투쟁적인 기도하라!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뜻이 하나되어 기도하는 자에게는 한나와 같이 대제사장에게 오해를 받아도 야곱과 같이 모든 소유와 정과 가정을 포기하는데 이르러도 엘리야와 같이 생명을 걸어도 다니엘과 같이 생명을 내어주어도 거기에는 추호의 손해도 없습니다.
그들이 다 몇 배나 땅 위에서 더 얻었고 그보다도 더 은혜 위에는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내는 아버지의 뜻과 한뜻을 품으신 그 뜻 이루려고 기도하시던 그 기도로 땅 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없어지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과 같은 뜻을 구하다가 지상성공을 보지 못하시고 죽어 주신 그 주님의 호소의 역사는 구약 하나님의 동지들의 호소에 지상 모든 승리자의 전체보다 오히려 죽어준 주님의 그 역사에는 수입이 더 켰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사욕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에 그 불행이 참혹하고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뜻이 하나된 그 처지에서 호소하는 기도는 당위에서 반드시 투자에 손해없는 승리를 하였고 만일 땅위에서 승리의 수입이 없었다고 하면 그는 완전 승리자 그리스도와 같은 성질의 승리를 얻는 것이니 이것은 은혜 위의 은혜요 권능 위의 권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먼저 사욕의 뜻을 적으로 삼아야 하겠고 하나님의 뜻 찾는 것을 모든 기도의 전부로 보아야 합니다.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함은 내 뜻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이것이 기도는 만능이라는 것입니다.
2010년 3월 12일, 04, A+, bongwon yoon, I. P.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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