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7:11-192009112201날자: 2009년 11월 22일 주일오전
제목: 배은망덕(背恩忘德)이냐 감사(感謝)냐?
본문: 누가복음 17장 11절 -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1.1. 필사적으로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기도의 응답으로 하십니다. 치유 받은 열 명의 나환자 이야기에서도 이들은 처음에 기도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절). 주님은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바른 방법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따라서 열 명의 나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자비를 구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기도를 잘합니다. 열 명의 나환자는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구할 때 얼마나 큰 소리와 간절함으로 자비를 구했겠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우리 하나님이 귀가 먹으셨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사적일 때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부흥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진정한 부흥의 공통분모를 이따금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 높여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열 명의 나환자는 동시에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절망에 처했던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심한 박해의 위협 앞에서 보다 더 필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의 위협을 교회에 알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행 4:24).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열 명의 나환자는 예수님이 자신들을 고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확실히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외치면서 자비를 구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급하게 읽다가 핵심을 놓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가장 먼저 구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자비 즉 긍휼하심입니다. 자비는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더라도 그분의 공의는 이루어집니다. 자비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 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황급히 나아가 마치 손가락을 까딱이는 식으로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보좌가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해 보면 참으로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와 긍휼을 얻으려고 힘쓰는 노력이 너무나 인색하고 거리가 멀지 않나 진단이 됩니다. 물론 집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피흘려 세우신 우리 교회에서 매일 새벽 기도회가 열리고, 저녁마다 기도회가 열리고 있음에도 참석하려고 힘쓰는 면들이 너무나 미미합니다. 어젯밤에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기도하는 것과 예배 드리는 것을 하나님 위해서 엄청난 배려를 해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믿고 싶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교만하게 보시고 섭섭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시간부터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와 일들을 앞두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기도하도록 합시다.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 자신의 위치(본분)을 알고 기도할 때
은혜의 보좌 앞에는, 간구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자신의 위치 즉 본분(本分)을 바로 알고 바른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결코 뚫을 수 없는 방패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에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왕이신 예수님이 앉아계신 은혜의 보좌 앞에 초대되었습니다. 우리는 먼지와 같은 보잘 것 없고 평범한 사람 임에도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초대받았습니다. 더욱이 아무 자격도 필요 없습니다. 정당이나 문화적 배경이나 피부색이나 교육 정도나 사회적 신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자비를 구하며, 이 순간 우리에게는 그 어떤 오만(傲慢)이나 거만(倨慢)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나환자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알았습니다. 이들은 슬프게도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이었으나 어쨌든 예수님이 자신들을 받아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병이 낫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비를 구했습니다.
열 명의 나환자가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은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수도 베풀지 않으실 수도 있으며 어느 쪽을 선택하시더라도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는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하나님께 더욱더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지나치실 수도 있었던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를 지나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도 우리에게 매우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하나님께 더 크게 감사하게 됩니다.
다윗은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라고 말하면서 경이감에 젖었습니다(시 16:6). 그는 하나님만이 그에게 선하셨습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자기 손으로 지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할 때도 이렇게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솔로몬의 몫으로 남겨두셨습니다. 다윗은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다윗은 여호와 앞에 앉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삼하 7:18-19).
존 뉴턴은 이 구절에서 영감을 얻어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라는 불멸의 찬송을 썼습니다.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라는 다윗의 고백이 뉴턴의 찬송에 스며있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우리도 하나님이 주권적인 자비를 베푸실 때 더 없이 감사해야 합니다.
나환자들은 소리쳤습니다. ‘우리를 긍휼히(불쌍히) 여기소서.’ 번역된 헬라어 단어 ‘evlee,w’(엘레오)는 다른 대부분의 곳에서 "긍휼"(mercy, 자비)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욱 본문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진실은 열 명의 나환자들처럼 우리도 자격 없고 무력(無力)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환자들처럼 자신의 처지를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누가 듣던지 개의치 않고 소리 높여 자비를 구할 것입니다! 아멘!!
2. 큰 소리로 찬양하며 감사를 표한 사마리아인
예수님은 나환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나환자들은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눅 17:15-16) 그는 앞서 자비를 구했던 만큼이나 간절히 찬양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드리는 찬양에 짜증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우리는 큰 소리로 드리는 찬양에 불쾌해 합니까? 우리도 이 치료 받은 나환자처럼 찬양할 때는 전 교인이 감사에 젖어 큰 소리로 찬양합시다.
나환자는 매우 매우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사람처럼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 치료받은 나환자처럼 감사를 표현했습니까? 주님께 감사하다고 말했습니까?
나환자는 나병에서 벗어난 몸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감사하는지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싶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나병이 낫다니, 사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이야기에서 특별한 점은 나음을 입은 열 명의 나환자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표했다는 사실입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자신들은 나음을 입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잊어버린 것일까? 어떻게 보십니까? 아마도 이들은 자신들을 낫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곧바로 잊어버린 게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 중에도 이런 사람이 없는지요? 우리는 이렇게 배은망덕한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요? 또 지금 “감사해요”라는 마음과 고백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이야기가 기록된 부분적인 이유는 돌아와 감사를 표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사라진 이스라엘의 열 지파 가운데 살아남아 사마리아에 정착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요 4:9). 따라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마리아인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하지 않은 나머지 유대인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
우리는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와 찬송에 인색하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각종 은혜에 대해서 목소리로도, 물질로도, 몸으로도, 시간으로도, 정성으로도 감사와 찬송을 아낌없이 올립시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에 속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표를 하지 않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하나님 앞에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3. 감사를 주목하시는 하나님! 배은망덕을 주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감사(感謝)를 주목(注目)하십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도 주목(注目)하십니다. 하나님의 주목을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주목을 받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 자비를 구하라!
둘째,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실 때 “감사해요”라고 말하라!.
예수님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8)라고 덧붙이셨습니다(눅 17:18). 하나님은 감사와 배은망덕을 주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인과 같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만물보다 더욱 심히 거짓되고 강팍한 마음과 몸을 가진 자들 아닙니까? 시편 103편 기자가 말한대로 우리는 먼지와 같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들 아닙니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 아닙니까? 그럼에도,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병을 고침 받은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격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과 거래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봅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감사치 않았던 과거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합시다.
마귀의 계략 가운데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세상일에 주목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그분께 불순종하더라도 기록조차 않으신다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하나님은 주목하지 않으시고, 보지도 않으셔”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신명기 39:19)
우리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집중하십니다. 우리는 슬플 때보다 행복할 때, 불편이나 조금의 희생에 대해서라도 감사를 표현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할 때 잊지 않고 그분께 감사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우울한 처지에 있더라도 계속해서 “감사해요”라고 말할 때 훨씬 더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도 “감사해요”라고 찬양할 때 우리의 가장 큰 영적 진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욥 13:15, NIV 직역)고 했습니다. 욥은 깊은 아픔과 아무도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사랑해주지도 않는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3~25)
이러한 욥의 말이 기록되었고 새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욥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평생 감사와 찬송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는 열 명의 나환자 이야기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은 비유를 두었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 17:7-10)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충격적인 구절 바로 뒤에 열 명의 나환자가 나음을 입었으나 한 사람만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의무를 다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나환자가 감사를 표하여 의무를 다했다고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는 사람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7).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 하면, 마땅히 그분의 복을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우리의 의무이며 마땅히 하나님의 칭찬으로 이어져야 하는 게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할 때 주목하시며, 우리가 감사하는 모습을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하나님께 “제가 감사했으니 알아주세요”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게 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명령인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마 6:3)라는 말씀과는 정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남은 평생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을 때마다, 느낄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해요”라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먼저 찾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죽도록 충성하여야 합니다. 그러고도 우리는 무익한 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된다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그와 동행하는 엄청난 축복을 누리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필사적으로 기도하여 응답받고, 받은 은혜에 배은망덕하지 않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삶에 교훈을 적용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질, 즉 우리의 위치를 항상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먼지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 주심에 진심으로 항상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우리는 기도할 때 필사적으로 간구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기도하였을 때 응답을 받았다면 사마리아인 나환자처럼 큰 소리로 진심으로 “하나님 아버지 감사해요”라고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감사를 주목하십니다. 또한, 배은망덕도 주목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이심을 항상 인식하고 감사 생활을 잘함으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 17:17-18)라고 책망받은 책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교훈을 우리의 삶에 온전히 적용시키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진광교회 모든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배은망덕 하는 자가 되지 맙시다. 우리는 감사와 찬송, 무익한 종으로 죽도록 충성하여 우리의 생을 마감하고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공 되세요.
참고 문헌: R.T. Kendall., Thanking God(감사해요 하나님), 전의우 역, 서울: 도서출판 바울, 2008. pp. 3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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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발아래 엎드린 사마리아인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나병환자 열 명이 서로 의지하며 병 낫기를 기도 했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고생만 하였고, 얼굴을 숙인 채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인생이 무슨 낙이 있으며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만 날 수 없음으로 큰 소리로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예수님이 들을 수 있도록 목이 터져라 하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 말 속에 피맺힌 소원이 있음을 예수님은 다 아실 것이라는 믿음과, 예수님은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셔서 그 모습을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시자 이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고 돌아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감사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아홉 사람은 제사장에게 그 몸을 보이러 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이겠지요? 율법도 알고 나병환자에 대한 정결 예법도 알기에 제사장에게 가서 병 나은 것을 확인 받아 어서 집에 가고 싶었겠지요. 그리고 이제는 소외된 삶에서 해방 되었다며 모든 사람들에게 회복 된 몸을 보이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겠다는 희망으로 부지런히 걸어 가겠지요? 그러나 먼저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함을 잊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만큼 그들은 마음속에 아직도 교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다. 사마리아사람과는 비교 할 수 없다. 사마리아 사람 당신은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교만함이 예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제사장에게 가서 병 나은 확진을 받아 세상으로 달려 나갈 것만 생각했습니다. 바로 나의 자화상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책망을 받아야 정신 차릴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많은 죄를 탕감 받았고, 여러 가지 인간 병을 고침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진정으로 감사드리는 것을 잊어버리고 당연하게 생각할 때가 많았음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은혜 주옵소서. 2009.11.22 주일 예배에 받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진해진광교회 이 정 민. 신청찬양 190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