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432009100953날자: 2009년 10월 9일 금밤
제목: 주려고 사는 사람
본문: 마태복음 5장 43절- 48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1. 나는 복 있는 사람인가? 복 없는 사람인가?
“복이 있다.” “복이 없다.” 하는 것은 어디다가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서 상당한 답의 차이가 있다. 돈에 기준을 두느냐? 많은 자식이 있느냐 없느냐? 많은 공부를 했느냐? 안했느냐? 남들 보다 쉽게 돈을 버느냐? 아니면 어렵게 돈을 버느냐? 건강하냐? 안하냐? 세상적인 성공을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그 복의 기준을 달라질 것이다. 오늘은 성경 말씀 중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기준에 근거하여 우리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 복이 없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자 한다.
바울은 밀레도에 있으면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이 기준에 따라서 우리 자신들을 평가하면 우리의 현재 상태는 복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복 없는 사람인가? 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는 자, 즉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주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실까?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한다.
2. 원수에게도 사랑을 베풀어라!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에게 대해서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교훈 해 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요즘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혈육이나 관계가 있는 사람, 나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을 위해서 사랑하고 주는 것은 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원수에 대해서는 사랑하거나 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은가 생각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계속해서 덫 붙이신다. 이렇게 사랑의 기준을 예수님이 정해 준 대로 실천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이렇게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간섭의 대상 밖의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은 선포이다.
우리 자신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리와 같은 문제아들도 잘한다는 것이다. 형제에게만 문안하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이방인들도 잘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사랑의 실천, 즉 주는 것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같이 온전히 주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주려고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는 어떻게 주는 삶을 사셨는가? 그는 원수인 우리를 위해서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희생하셨다. 또, 구원해 주신 이후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를 쏙 썩이고 애를 먹여도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주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만약 우리를 이처럼 사랑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마도 병신 내지는 굶어 죽거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함께 하시고, 하마나 인간이 되려나 하고 인내심으로 기다시고 계셔서 오늘 이 자리에 인도해 주시고 기도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3. 두 종류의 주는 사람
3.1. 보상을 바라느냐? 바라지 않느냐?
이 세상에 주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살려고 주는 사람이다. 둘째는 주려고 사는 사람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베푸는 일에서 매우 다른 성향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살려고 주는 사람은 절대로 보상이 없으면 남을 돕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주고받는 것을 항상 기억하거나, 기록해 둔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자신이 남에게 베푼 것보다 받는 것이 많아야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만약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보상을 받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받았던 사랑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고 주시기만 하셨다.
주려고 사는 사람은 살려고 주는 사람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주려고 사는 사람은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이런 사람의 관심은 “이 사람을 도와주면 내가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이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잘 도왔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사활대속이라는 답으로 모범을 보이셨다.
3.2. 최소치냐? 최대치냐?
살려고 주는 사람은 항상 “내가 얼마나 더 베풀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그의 목표는 “겨우 충분한” 정도만을 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딱 “최소치”만을 주기 원한다. 살려고 주는 사람은 항상 “내가 얼마나 더 베풀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원에 필요한 것은 모두 다 주셨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주려고 사는 사람은 항상 “이 어려운 사람은 얼마나 더 필요한가?”란 질문을 한다. 이 사람은 그 어려운 사람의 필요를 채울 때까지 계속해서 준다. 이 사람의 목표는 그 어려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최대치”를 주고자 한다.
3.3.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바라느냐? 바라지 않느냐?
대체로 살려고 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바란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얼마만큼 인정해줄 것인가에 따라 이들은 얼마만큼 베풀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혼자서 베푸는 법이 거의 없다.
이들은 대중이 사라지고 나면 선행을 베푸는 것이 어렵다고 느낀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그냥 지나쳤던 제사장과 레위인도 그 사건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분명히 도와준 적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선한 일을 행한 적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왜 길가에 있던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가? 왜냐하면, 한적한 길가에서는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고 해도 그것을 지켜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객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돕는다고 해도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려고 사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인정이 베푸는 동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경우 인정을 받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이 베푸는 주된 원인은 아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든지 하지 않든지, 또 어떤 보상이 있을 것인지에 상관없이 남을 돕는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사람은 주로 조용히 또 비밀리에 남을 돕기를 좋아한다. 선한 사마리아 인은 이러한 사랑의 모범을 잘 보였다. 아무도 보는 이 없어도 사랑의 실천을 하였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기대하시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고 돕기를 힘쓰는 분들이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감사한 분들이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교회가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3.4. 얼마만큼 소유하느냐? 얼마만큼 다른 사람이 회복이 되었느냐?
“살려고 준다”는 철학은 근본적으로 매우 이기적(利己的)이다. 이런 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실상 “주지 않아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들은 남에게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이 얼마나 많든지 간에,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내 재산이 얼마나 남았는가?”이다. 그들은 남을 구제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파산 할까 봐 두려워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성공의 기준은 자신이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는가이다.
“주려고 산다”는 철학이 기독교 철학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을 위해 주셨던 것은 바로 이러한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예수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이 철학을 강조하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계산 없이 비와 햇빛을 주셨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베푸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베푸는 삶이다!
“살려고 주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매우 명백하다. 그 사람의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항상 되돌아오는 보상이 불충분하다고 느낀다. 이런 사람은 이기적이고 항상 적은 분량을 되돌려받을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주려고 사는 사람을 보라. 그의 유일한 불만족은 도울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이다. 이 사람은 남에게 베풀 때 정말로 기뻐하고 행복해한다! 왜 그런가? 그가 올바른 동기로 남에게 베풀기 때문이다. 그의 기쁨은 남을 돕는 것이다. 자신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감사의 미소를 지으며, 이제야 살 소망이 생겼다고 안도의 숨을 쉴 때, 그는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느낀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즐겨 내는 자’(고후 9:7)라고 말씀하셨다. 이들은 남을 도울 때 희생이 따르지 않으면 아직도 충분하게 돕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기름의 결실을 보기 전에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기심, 욕심, 그리고 개인적인 욕망의 단계들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통과해야만 드디어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 수 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받는 사람이 치유와 회복이 됨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기쁠 때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4. 다른 사람이 회복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가 되기까지 기쁨으로 주는 자가 되라!!
우리도 이제부터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가 잘 되는 것으로 기뻐하시고 만족하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 즉 우리도 다른 사람이 지금의 상황에서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가 되기까지 필요를 채워 주고, 기도해 주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장 많이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중보기도이다. 기도 외에도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려고 기쁨으로 주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 실천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함께 하시고,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이다. 주인공 되세요.
참고문헌: Maxwell, J.C.,「자기 경영의 법칙」(Meditations for Leaders), 이용석 역, 서울: 요단, 2006. 189-193.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10-10 1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