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사람 사무엘처럼

2009.08.08 13:06

윤봉원 조회 수:1006 추천:48

삼상 2:11-3020090730

날자: 2009년 7월 30일 남정교회 청소년 수련회
강사: 윤봉원 목사
제목: 순종의 사람 사무엘처럼
본문: 사무엘상 2장 11절-30절
1. 나의 삶은 정상적인 인간 구실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자존하시고, 목적하시고, 예정하시고, 예정을 따라 하나님의 전지의 지혜와 전능의 능력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 있고, 영광스런 피조물은 없습니다. 여러분들? 인간보다 아름다운 존재가 있을까요? 한 번 말해 보세요.
아담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살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아담은 아내를 내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할 때 얼마나 아내에 대한 아름다움에 반한 감정이 묻어 있잖습니까? 그러한 고백을 들은 하와는 아담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 보았을까요? 많은 한국의 가정 부부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서로 못 죽여서 살고, 못 나뉘어서 살고, 원수 중에 원수가 상대방 부부라고 인식하며 살아가는 문제의 가정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행복한 가정이 깨어지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나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로 그들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뼈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했던 그 착하고 선량하고 믿음직하기 그지 없던 사람 아담의 입에서 말로 담기 더러운 말을 하였습니다. 한 번 같이 읽어 봅시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이 표현은 범죄의 책임이 자신에 있다고 고백하는 “내 탓이오”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에게 있습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여자 “그”가 줘서 먹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이러한 모습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 정상적인 인격의 모습을 다 잃어버린 타락한 모습이요, 비참한 모습이요, 완전히 변질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범죄라는 것이 이렇게 인간을 비참하고도 비정상적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죄는 죽기까지 싫어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창조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모습을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이번 집회 기간에 배웠던 요한복음 11장에 죽은 나사로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베로 동인 채로 나옴으로 말미암아 얼굴도 가려져 있었고, 수족도 동여맨체로 나왔기에 참다운 인간 구실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누이들로 말미암아 풀려났을 때 그제야 인간 구실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하나님이 보실 때나 우리 인간(부모, 친구, 목사님, 선생님, 선배, 후배들)이 볼 때에 “아, 저 남정교회 청년은 꼭 예수님 같아, 저 친구는 우리 조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제일 중요한 사람이다. 신앙이면 신앙, 공부면 공부, 대인관계면 대인관계, 사람 구실이면 사람 구실은 저 청년처럼 해야되!” 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지요? 한 번 손을 들어 봅시다. “내가 바로 그런 모델이다.”라고 자신에 대한 판단이 되는 분!!
그러면 반대로 “저 청년은 우리 조직에서 꼭 없어졌으면 좋겠다. 말하자니 그렇고, 안하자니 괴롭고, 스스로 알아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저놈의 자식만 없으면 우리 가정이 평안하고 행복하며 돈도 좀 들 것인데?” 하는 골칫덩어리로 취급받는 사람은 아닌지요?
이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이 목적하시고 지으신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은 어떤 길이며, 그와 반대의 길은 어떤 모습인지를 사무엘을 통하여 알아보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바로 정립하여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목적 완성의 주인공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2.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2.1. 불량자요, 사욕쟁이요, 하나님을 무시한 자들
먼저 우리는 하나님 창조의 목적을 정립해 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시고,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통하여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건강하게 잘 자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 달성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그런데 우리는 사무엘상 2장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렇지 못하였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량자(不良者)라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2:11) 말씀했습니다. 그들은 제자장들이었다. ‘불량자’에서 ‘불량’은 원어로 “벨리야알”인데 그 의미는 “무가치함, 무익함, 소용없음, 파멸”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의 인격은 가정에서나 성전에서나 백성 사이에 참으로 도움이 안 되는 문제아들이었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물을 삶을 때 걸려 오는 것은 하나님께 자사를 드리기도 전에 먹었습니다. 또 기름을 태우기 전에 먹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삶지도 않은 날 고기를 취하였습니다(가장 맛있는 부위, 생고기를 구워서 먹은 것으로 보임).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먹어야 된다고 바른말을 지적하면 그 말을 듣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억지(憶志)로 빼앗아 먹었습니다(2:16). 이상과 같은 행위는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 행위들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한 행위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을 증명하는 행동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행위는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귀한 음식, 맛 있는 음식은 높은 사람, 귀한 사람, 연세 높은 사람에게 먼저 드리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덕도 없는 참으로 불량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 2:16-17)
2.2. 아버지의 말씀도 무시(無視)하는 불효자식!
두 아들의 아버지 엘리가 늙었을 때 이 두 아들은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2:23-24)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이 책망 속에서 우리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얼마나 하나님의 계명인 7계명을 범하지 말라는 것을 무시하는 행위를 일상적으로 범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나쁜 소문은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기까지 일상적이었습니다. 또 이들의 행위는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사해 주는 일을 감당하고, 죄짓는 백성들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아 주는 역할을 해야 함에도 정반대로 그들은 백성으로 하여금 더욱 죄를 짓도록 하는 악한 행위였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다른 사람들을 더욱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돕고 그들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돕는 일은 하지 않고 백성의 신앙 인격을 파괴하는 나쁜 행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율, 주관, 사욕이 이렇게 인간을 강퍅하고, 불량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아는 엘리는 그들에게 “이런 악한 행위, 나쁜 행위는 아무도 너희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있겠느냐? 그러니 당장 그쳐라!”고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지적과 충고에 대해서 한마디로 거절하고 듣지 않았습니다(2:25).
2.3. 자기들도 죽고 아버지까지 죽도록 함(자타(自他)를 죽임).
이 두 아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있을 때에 자기들의 생명이 위급하니까 하나님의 궤를 의뢰하려고 그룹 사이에 있는 여호와의 궤를 가져왔다. 그러자 백성은 이제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여호와의 궤를 가져 오기 전에 죽은 자는 4,000명이었으나 이제는 3만이 패하였다(4:1-11). 이 전쟁에서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블레셋에게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4:18).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구별할 것은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그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그의 뜻을 구하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용을 당하시지도 무시당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하나님께 무시와 버림을 받아서 결국 전쟁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 하나님의 제물과 예물을 사욕으로 취하는 것을 일컬어 밟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의 행위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중(重)히 여긴 행위로 말미암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삼상 2:29)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심히 격분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존중(존경하다. 귀중하다)하는 자를 그도 존중히여기시고, 자신을 경멸(멸시하고, 업신여기고, 천대하는 자)는 하나님도 그를 경멸(멸시하고, 업신여기고, 천대하고)히 여기시겠다고 단호히 선언한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2.4. 저 모습은 내 모습인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창조적으로 우리의 주인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인이 사단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사활대속의 공로로 주님의 피에 팔린 주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주인이 우리 인간이 아니요 주님이십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값으로 사신 하나님이 주인이시기에 우리 몸을 자기의 집으로 즉, 성전 삼고 계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2-23)
그러므로 이 사실을 깨달은 자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다윗: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를 찾았나이다’(시 119:94)
바울: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항상 인식하고 살아왔나요? 아울러 우리의 삶의 목표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삶을 잘 살아 왔나요? 또 이 목적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열심히 충성하고 있나요? 혹시나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이러한 주인의식, 목표의식은 공부하느라, 노느라, 인터넷하고, 게임하고, 만화보고, 노느라 바빠서(자율, 주관, 사욕에 얽매여) 온데간데 없고 불량자(“무가치함, 무익함, 소용없음, 파멸”)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또 이러한 모습을 잘못 살아가는 것으로 보고 부모, 친구, 목사님, 선생님, 이웃이 “네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면 안되요!”라고 지적하면 “내 마음이지” “다 알아서 해요!” “이제 됐어요! 그만하세요!”(하지만, 됐으면 왜 지적을 받는지?) “더 이상 듣기 싫어요 내 버려 두세요.”라고 반항하며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의 사람은 아닌가요? 벽창호는 아닌가요? 만약 이러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우리는 즉시 회개하도록 합시다. 고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요, 회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단추입니다. 문제 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이번에 증거 받은 말씀처럼 이러한 삶은 우리의 마음, 중심, 몸에 예수님과 말씀을 모셔 들이지 아니한 삶입니다. 이 삶을 하면 할수록 죽음의 생활이요, 무익한 생활이요, 인생을 허랑방탕하게 보내는 삶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쫓았던 예수님과 말씀을 우리의 마음, 몸, 중심에 다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참된 인격 새사람의 양식인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살아가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삶을 계속 해 나가야 합니다.
3. 사무엘
3.1. 환경을 이용한 착한 사람!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그 길을 사무엘을 통하여 찾아봅시다.
사무엘은 그의 어머니 한나가 아이가 없어서 심히 애통하고 고민하다가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만약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약의 기도를 하고, 그 기도의 응답을 통하여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제사장 에봇을 입고 엘리를 돕는 성전 일을 하면서 여호와 앞에서 자랐습니다(2:11, 18-21).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불량아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문제아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추측을 해 보건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무엘에게 제사 제물의 고기를 같이 먹자고 제안을 하였을 것입니다. 또 성전에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을 하면서 사무엘에게도 그것을 권하였을 것으로 추측 해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 너는 바보같이 그렇게 생활을 하니 우리처럼 좀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삶이 아니겠니?”라고 얼마든지 유혹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에 사무엘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 마디로 그의 자란 무대는 좋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불량아 홉니와 비느하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라면 자랄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은총을 받았습니다. 겨자씨 믿음과 같이 환경에 피동되지 않고 오히려 그 환경을 이용해서 구원의 재료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청년들은 모두 이런 청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 2:26)
3.2.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존중함으로 순종함.
사무엘은 자라면 자랄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문제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로 자란 엘리의 두 아들들과는 비교(比較)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자라면 자랄수록 하나님께 은총과 사랑, 귀여움과 좋은 평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무시하고 존중히 여기지 않은 것과는 정반대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순종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하나님의 인정(認定)인 것입니다.
그는 사무엘상 16장 다윗을 기름 부을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으로 기름을 부었다.

따라서 사무엘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경멸히 여김으로 하나님께 업신여김 받고 경멸히 여김 받은 홉니와 비느하스와는 반대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김으로 그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존중히 여김을 받은 사무엘은 사무엘상 9장 6절에 ‘하나님의 사람’,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가 말한 것은 다 응함을 받았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3.3. 자타를 살림
아울러 사무엘은 사람들에게도 은총과 사랑, 귀여움과 좋은 평을 받았습니다. 소금으로 말하면 엘리의 두 아들이 맛 잃은 소금이라면 사무엘은 맛을 간직한 소금이었던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기도로 나를 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전적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역사를 통하여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가정교육이 홉니와 비느하스가 신앙적이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반면 기도의 어머니, 믿음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그는 사회적이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면에서도 구비한 자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해서 이런 아름답고 멋진 인격의 사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의 지혜와 능력이 그를 그런 존귀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는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을 보여 주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그를 이렇게 성장시켜 주셨던 것입니다(예, 3:19-4:1). 사무엘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잘 알아듣고 순종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세 번이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하나님의 음성인줄 몰라서 엘리를 찾아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명령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다윗을 기름부어 왕을 세우는 일은 사울 왕에게 미움을 받아 목숨을 잃어버릴 위험이 따르는 명령이었지만 순종하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생활을 했던 사무엘은 자신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보호하심을 힘입어 죽지 않았고, 백성들도 ‘여호와만 섬기라’고 회개를 권고하니 미스바에게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었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칼을 쓰지 않고도 하나님이 큰 소리와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함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이 도우셨음에 대한 기념비로 ‘에벤에셀’(삼상 7:12)을 세웠습니다.
4. 사무엘처럼 하나님을 존중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는 주인공이 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재 참모습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 형상대로의 참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회개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모습을 철저히 연구하고 묵상하여 우리의 거울로 삼아 어떤 경우에도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정욕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참 인격을 상실한 불량자가 되지 맙시다!
또 우리는 그들처럼 부모를 속상하게 하고, 죽게 하는 불효자가 되지 맙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경멸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구별된 삶을 삽시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자신은 주님의 피에 팔린 주의 것이라는 사실, 우리의 삶의 주인이신 주님을 항상 기억하고 존중히 여기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 영광의 찬미가 되도록 합시다.
우리의 몸을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존귀케 영화롭게 하는 돌리는 산 제물이 되도록 하라!
나의 자율, 주관, 사욕을 포기하고 어떤 현실에서든지 하나님의 인도와 뜻을 따라서 사무엘처럼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순종함으로 자타를 살리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라!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8-08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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