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가치로 둘 것

2009.08.07 20:06

윤봉원 조회 수:839 추천:27

고후 4:16-182008080753날자: 2009년 8월 7일 금밤
제목: 성도가 가치로 둘 것
본문: 고린도후서 4장 16절∼18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 나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가?
사람들은 자기가 가치를 두는 것에 따라서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 합니다. 운동에 가치를 두는 사람을 운동을 위해서, 공부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공부를 위해서, 돈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돈을 위해서, 기술에 가치를 두는 사람, 예술에 가치를 두는 사람, 노름과 행락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전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들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치로 두는 것이 성경적인 것인가요? 아니면 불신자들과 같은 세상적인가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가치로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확인 해 보고 성경대로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되도록 합시다.
2.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점점 온전해 진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와진다.’ 이 겉사람은 우리의 이 육의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첫째 아담에게 받은 사람은 하루 살면 그만큼 늙고 또 일 년 살면 그만큼 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죽습니다. 그러나 속은 날로 새로와진다 한 그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활의 대속을 받은 그 사람은 점점 깨끗해지고 점점 온전해져 가고 있습니다.
3. 환난을 통해서 지극히 크고 영원하고 중한 것을 이룬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할 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합니다. 우리가 어려움 당하는 그것은 그 어려움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얻어지는 것은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가?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아주 환난의 경(輕)한 것이, 아주 가벼운 그런 환난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 이렇게 신앙생활할 때에 땅위에서 어려움 당하는 것을 사람들은 다 싫어하지만 어려움 당하는 그것으로서 없어질 것은 자꾸 없어지고 영원한 것, 중(重)한 것으로 바꾸는 수입을 보게 됩니다.
믿는 성도가 어려움을 당하면 없어질 땅의 소망은 차차 더 없어지고 하늘의 소망은 점점 더 견고해집니다. 또 첫째 아담에게 속한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 욕심, 자기주장, 자기 지식, 자기 소원 그런 것은 차차 차차 거짓되고 잘못된 것인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것은 차차 차차 제거돼지고 참 영원히 가도 없어지지 안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그런 것이 우리 속에 이루어집니다.
4. 돌아보는 것은 가치로 두는 것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돌아본다는 말은 우리가 뭣을 가치로 삼느냐, 뭣을 상대로 삼느냐? 땅위에 환난당함으로 곤란당하는 것, 환난을 당함으로 없어지는 것, 환난을 당할 때에 그 환난의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은, 그것이 환난만 만나도 병들고 또 상하고 없어지는 그런 것들은 마지막 죽을 때는 다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에 그것이 없어질 그런 것들은 장차 다 없어질 것들이요 환난을 당해도 없어지지 안하고 환난을 당할수록 더 그것이 새로와지고 깨끗해지고 온전해지는 그런 것은 다 영원한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가치로 여기는 것은, “그런 것은 돌보지 안한다, 그런 것은 생각지 않는다.” 또 “우리가 그런 것을 생각한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돌아본다 고했습니다.
5.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가치로 여기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는 것은 이 세상에 첫째 아담에게 속한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것과 같은 그런 것들은 다 보이는 것들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이 세상의 과학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과학적으로 확실하다’ 과학은 사람들이 확실한 줄 알고 있습니다. 과학은 확실한 줄 알고 있지만 확실하다고 하는 그 과학은 잠시 잠깐 후면 없어질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봤나? 현미경으로 봤나?” 보이는 것만 위주로 하는 사람들은 그 없어질 것들만 다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은 뭐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신령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약으로 우리에게 선포해 놓으신 것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약으로 우리에게 선포해 놓으신 것인데 이것은 영원합니다. 계약 속에 있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내 것 삼는 방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사실을 믿을 때에 믿는 자의 것이 되고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한다 하는 자요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자에게 그 약속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을 위주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다 무시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하는 모든 과학자는, 또 안 믿는 모든 불신자는 보이는 것만을 위주로 해서 보이지 않는 것은 가치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보이는 것은 육안으로 보이는 것, 또 자기의 이성 판단으로 보이는 것, 자기 주관으로 보이는 것 이런 것만 가치로 여기고 확실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것만을 위주로 해서 사람들이 삽니다.
보이는 것이 많으면 많은 사람, 보이는 것이 크면 큰 사람, 또 보이는 것이 구비하면 구비한 사람, 보이는 그런 것들이 다 강하고 크고 풍성하면 그 사람은 그렇게 강하고 크고 풍성한 사람으로 가치로 인정을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주 무시합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과학과 기술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용사와 네피림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기술이 제일이라 과학이 제일이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다 치우쳐지고 말았는데 노아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없이 미구에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세상이 무시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움직였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은 무시하고 저희들의 주관과 저희들의 이성이 감각할 수 있는 이런 모든 보이는 것들만을 상대해서 살았었는데 하나님이 당신이 홍수 심판을 내리니까 그들이 뭐 이런 것 저런 것 지저분하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을 말했지만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이기고 홍수 심판을 꿰뚫고 위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다 그 아래서 멸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무식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 우주보다 크고 가치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져 창조된 것인데 하나님의 약속은 이 창조된 모든 것보다 크니 모든 우주와 영계를 창조한 그 능력을 가진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러기 때문에 노아는 그 약속을 크게 가치로 여겼고 모든 사람은 보이는 그것을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그 두 편의 생활은 갈라졌습니다.
세상 사람은 노아를 보고서 조롱하고 훼방하고 불쌍하고 가련하게 참 속는 자로 알았고 노아는 하나님의 계약을 의심없이 믿기 때문에 그들이 지금 분발하고 가치로 여겨서 다 대우하고 부러워하고 하는 그런 것이 다 속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온 세상이 노아의 여덟 식구를 조롱하고 멸시 천대하고 무가치하게 보고 있는 그 상대자가 되어 있으면 노아는 일백이십 년 동안을 피곤한 줄 모르고 조금도 그는 낙망이나 절망이나 비겁이나 자기의 열등감을 가지지를 아니하고 기쁘고 즐거워하고 모든 그 세상 사람을 부러워하지 안하고 도리어 불쌍하고 가련해서 견디지 못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노아는 그들이 보기에 불쌍하고 가련하고 그들은 노아가 보고 불쌍하고 가련합니다.
그것은 왜 그들이 노아를 그렇게 여겼던가? 여긴 것은 보이는 그것만 위주로 했지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보니까 그들은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정반대로 노아는 왜 그들을 불쌍하고 가련하게 그렇게 보고 자기는 행복되다고 여겼던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 계약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일차 홍수 심판 된 것인데 우리에게 형식 계시로, 역사 계시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보이는 이것을 위주로 가치로 중하게 확실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약속은 허무하게 여기는 그자는 다 멸망하고, 하나님의 이 약속의 한 마디가 없는 가운데서 우주를 만들 수도 있는 그런 능력이 있는 말씀인 것을 믿고 그 계약 가치로, 계약 위주로, 계약 권위로, ‘계약만이 앞으로 그대로 이루어지고 남아 있지 그 계약에 없어진다는 그 모든 것은 없어진다.’ 계약을 믿으니 세상 사람 하는 것이 무가치하고 불쌍하고 가련했고 계약을 믿으니 자기의 생애가 가치 있고 행복된 그것을 느끼면서 피곤치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때는 옵니다. 마지막에 홍수 때가 오고 보니까 그들은 다 헛일했고 노아는 그는 우주를 다 차지해서 하나님 후사가 됐던 것입니다.
6. 노아처럼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두는 자가 되라!!
이제부터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요것을 자꾸 생각해 봅시다. 보이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과 영원무궁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재림 때에 다 불탈 것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건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에 있는 것이요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과학이나 그런 것은 다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한다 하는 그 홍수는 보였습니까 안 보였습니까? 홍수는 보이는 것입니까 안 보이는 것입니까? 노아 홍수 시대에 모든 세상 과학자들과 모든 사람이 볼 때에 노아 홍수는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안 보이는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을 믿는 노아에게는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노아에게는 보였습니다.
노아에게는 보이는데 세상이 안 보인다 하는 그것을 노아는 세상 모든 것보다 그것을 더 크게 여겼습니까 세상을 크게 여겼습니까? 어느 것을 크게 여겼습니까? 노아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더 크게 여겼습니까 세상에 보이는 온 세상에 가득찬 그런 것을 크게 여겼습니까?
홍수 전에는 그들이 큰소리쳤지만, 홍수가 닥치니까 누가 큰소리 했습니까? 노아 외에 모든 사람은 다 매몰되고 다 멸살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꼭 그때와 같이 하나님이 지금 시험하시고 계시는 오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공연히 거기에 그 충격받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데에 샘을 품지 않습니다.
참조. 86121950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8-0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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