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3:8-182008122801날자: 2008년 12월 28일 주전
제목: 두 가지 선택의 길
본문: 창세기 13장 8절~18절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 하면 나는 우 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 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1. 예수님과 신앙의 인물들이라면?
우리는 성경 말씀과 모든 법칙과 제도를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또 신앙 인물들을 생각할 때에 우리에게 신앙의 길이 밝혀질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무슨 일을 자기가 당할 때에, 첫째로 ‘예수님이면 이 일을 당했을 때에는 어떻게 하시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거기서 많은 지혜를 얻습니다. ‘이 사람을 만났는데 예수님이면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처리하시고,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을 하시고, 취급을 하시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좀 간단하고 명료하게 되기 쉽습니다.
또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브라함의 당한 일이 우리에게 매일 매일 당하는 그 일과 알고 보면 꼭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어떻게 자기가 매일 매일 닥치는 그 현실을 처리해 나갔지?’ 하는 것을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2. 현실에서 따져 보라
2.1.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
우리는 현실을 당했을 때에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를 항상 따져 봐야 합니다. 신본주의라 말은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위주로, 하나님 중심으로, 무슨 일을 닥쳤든지 ‘자, 여기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님을 좋게, 하나님을 위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것이 신본주의입니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만 원한다’(빌 1:20)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라 말은 예수님이라 말인데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했는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을 베푸신 이가 예수님이시요, 대속의 공로를 택자들에게 입혀서 그 택자가 제사장 은혜, 선지자 은혜, 왕의 은혜를 입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그 하시는 직책이 완성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직책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피조물이 다 만족할 수 있는, 그 계획이, 경영이 달성되기를 위해서 자기는 죽든지 살든지 그것 위해서 다 바치는 그것이 자기에게 유일한 소원이 되는 것인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하나님 안 생각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크신 분인 줄도 알고, 또 섬겨야 될 분인 줄도 알고, 또 두려워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자기보다 하나님을 낫게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소돔 들을 취하지 않으면 자기의 그 모든 것이 다 절단나지니까, 하나님께 섭섭해 하시고 아브라함이 섭섭해 할 줄은 알기는 알지만 자기에게 손해가 가니까 안 되겠다 그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 생각하는 것보다 자기 생각하는 것을, 낫게, 앞서서, 먼저, 더, 보다 이렇게 생각한 그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이 자기보다 하나님을 낫게 여기는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인간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존귀케 하도록만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래서, ‘나는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다. 내야 죽든지 살든지 이렇든지 저렇든지 나는 어쨌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있는 자라’ 하는 요 위치를 바로 잡아 놓지 않으면 헛일하는 것이요, 삶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본주의입니다.
롯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앞서 생각하고, 자기 때문에 하나님을 뒤로 두고 자기를 앞서 생각하는 그 길을 걸었으니까 롯은 신앙에서는 감감한 사람입니다. 지금 롯의 노선에 서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가 ‘진리, 진리’ 아무리 말해도 자기의 혈육의 정이나 감정이 있으면 진리는 당장 다 버려 버리고 무슨 짓이라도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서 자기가 현실 현실 당한 데에서 ‘자, 내가 신본의 길을 걷느냐 인본의 길을 걷느냐?’ 자꾸 따져 봐야 합니다. 티끌 모아 태산 된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현실에서 신본의 길을 걷게 되면 최종에는 자기가 어떤 무엇이, 세상이, 피조물이 다 달려들어도 신본주의로 사는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2. 타협주의냐? 신앙주의냐?
아브라함은 신앙주의로 나갔고 롯은 타협주의로 나갔습니다. 타협이라 말은 서로 다른 것하고 의논해 가지고 거기에 맞추어서 나가는 것을 타협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세상은 다 타협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신앙은 타협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동(動)하면 동(動)하고 정(靜)하면 정(靜)하고, 하나님 한 분의 뜻만 찾아 가지고 그대로만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 가까운 사람에게 배치가 되거나 먼 사람에게 배치가 되거나 한 사람에게 배치가 되거나 백 사람에게 배치가 되거나 온 교파와 배치가 되거나 말거나 하나님의 뜻 하나 그것만 찾아 가지고 그대로만 밀고 나가는 사람이, 그 사람이 신앙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하나님이 붙들고 일하십니다.
약하든지, 외롭든지 혼자든지 어쨌든지 신앙으로 나가는 사람은 이제 신앙으로 나가는 그것 반대하는 타협주의자들을 전부 이 세상에서 점령을 하든지 세상에서 점령 안 하면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 다 점령해서 그가 다 부하로, 그 슬하로 다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그 뜻을 인간의 생각과 서로 조화를 붙여서 종합을 해 가지고 서로 흥정하는 그것이 타협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뭐 ‘아, 뜻인데 아무것이가 이렇게 말하던데, 몇 사람이 이렇게 말하던데 ….’ 하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뜻에는 가감도 없고 양보도 없고 에누리도 없고 누구로 더불어 서로 흥정해서 서로 양보하고 타협할 그런 것도 없고, 그저 하나님의 뜻이면 복종하는 그것이 신앙입니다.
타협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타협은 ‘아무리 하나님 말씀은 그렇기는 그렇지만 그 사정과 형편이 이러니까 그것도 좀 서로 조화를 해서 흥정을 붙여서 그렇게 좀 하면 좋지 않느냐? 꼭 그대로만 해 가지고 되겠느냐’ 하는 그것이 타협주의요. 조그만큼이라도 양보하고, 서로 밀고 당기고, 너 얼마 양보하고 나 얼마 양보하고, 하나님의 뜻 얼마 양보하고 또 인간의 뜻 양보하고 이래 가지고 하나님의 뜻 하나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 나가자 하는 그것이 타협주의인데 롯은 타협주의로 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족이고 사물이고 자기 사업이고 모든 것이 절단 나도 하나님의 뜻이면 그만 사나 죽으나 그대로 나가는 그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주의입니다.
2.3. 하나님의 축복이냐? 조건이냐?
‘소돔 고모라는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겼다’ 여호와의 동산 같다 말은 에덴동산같이 모든 것이 풍부하다 그 말입니다. 또 애굽은 지금의 미국 같이 풍부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롯은 요단을 택했습니다. 롯은 눈에 보이는 것, 현재에 되어 있는 것 또 앞으로 아주 희망이 있는 것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현재의 상태를 귀중히 여겼지만 현재에 잘 되어 있는 이 상태와 하나님의 축복과 이 둘을 두고 ‘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현재 잘 되어 있는 이 상태를 내어 놓아야 되고 현재에 있는 이 상태를 네가 취하려면 하나님의 축복을 내놔야 된다’ 하는 그 둘이 서로 견제될 때에 그럴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택했고 롯은 현재에 잘 되어 있는 그 현상을 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고 현재에 되어 있는 것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현재에 되어 있는 것도 아주 귀중하고, 현재에 무엇이 되어 있는 것과 되어 있지 않는 그것은 참 천지(天地)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에 잘못되어 있는 것과 잘 되어 있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못 하면 기독자들이 염세주의가 되고 또 기독자들이 세상을 무시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잘 못입니다.
롯은 소돔 들이 보기 좋으니까, 그게 분명히 자기 삼촌 아브라함에게 거리낀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그때는 성경이 없는 때이니까 양심을 가지고 사는 양심 시대인데 자기 양심에 그게 거리낀다 그 말입니다. 그게 분명히 그래 하는 것이 하나님을 거슬려 가는 것이요, 또 아브라함을 거슬려 가는 것인 줄 알지만, 자기의 현재 보이는 소돔 들이 그렇기 때문에 소돔 들을 택하고 아브라함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유물주의요, 현재 되어 있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그것을 크게 여겼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그 뜻과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축복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가견주의였습니다.
그러므로 롯은 유물주의요, 아브라함은 축복주의였습니다. 롯은 타협주의요, 아브라함은 신앙주의라. 롯은 인본주의요, 아브라함은 신본주의라. 이렇게 구별을 시켜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을 닮아 갑시다!
우리는 우리 인생걸음 걸이에는 아브라함과 롯의 길 두 길이 있다는 것을 잘 생각하면서 자기 신앙 걸음을 조심 있게 걸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롯을 닮지 말고 아브라함과 같이 ‘신본으로 하자. 신앙으로 하자.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자. 축복 받도록 하자. 하나님을 따라 움직이자.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살자.’ 다짐합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나가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그래 나가면 사람 보기에 그 사람이 죽는 날까지 실패해도 그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그 성공을 세상에 일으킬 것이고 무궁세계에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고것을 잘 생각해서 일은 하나님의 축복주의로 하십시오. 또 모든 일을 판정할 때는 타협주의로 하지 말고 신앙주의로 하십시오. 또 무엇이든지 할 때에 일을 무슨 목적으로 하느냐? 일하는 목적은 신본으로 하고 인본으로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다 성공합니다. 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성공을 못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신본주의 롯은 인본주의, 아브라함은 신앙주의 롯은 타협주의, 아브라함은 축복주의 롯은 유물주의. 이것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백프로 믿읍시다. 믿고 그대로 행하면 다 복 받을 것이고 안 하면 다 망할 것입니다.
{참조. 83042510}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2-27 2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