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도 못 믿는 믿음

2007.10.10 20:34

윤봉원 조회 수:1079 추천:66

막 16:9-142007101033

날자:2007년 10월 10일 수밤
제목: 듣고도 못 믿는 믿음
본문: 마가복음 16장 9절 -14절
1. 나의 믿음은 듣고 믿는 믿음인가 듣지 않고도 믿는 믿음인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2. 듣고도 믿지 아니한 자들
2.1.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도
막달라 마리아는 마가복음에서 네 번째로 언급되고 있다(막 15:40, 47, 16:1). 이 마리아는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이라는 상세한 설명이 여기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왜 그에게 나타났는지는 잘 납득이 안간다. 그러나 그녀에게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나타난 것은 그녀의 믿음 때문으로 보인다. 그녀의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귀신 쫓아냄을 받은 이후로 예수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죄인이었고 심한 고통을 겪은 과거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단순한 믿음과 용기와 사랑은 그녀를 칭찬 받을 만한 사람으로 드러나게 하였다. 이는 그녀의 조용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 증거 구절은 앞에 언급된 추가적인 본문 세 군데와 다음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1-3)
마리아는 16:7절에서 천사가 그녀에게 주었던 명령을 실행했다(참조. 막 14:28). 그녀는 제자들이 슬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10절). 예루살렘 사람들이 유월절과 무교절을 경축하는 동안 제자들은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울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예수가 살아 있음과 그녀 자신이 그를 보았으므로 예수의 다시 사심이 사실이라고 증거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16:11)고 하였다. 그녀의 말을 제자들이 믿으려 하지 아니한 것을 이해할만하다(11절). 왜냐하면 부활은 보통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6-17)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0-11)
2.2.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도
이 구절들(막 16:12-13)은 틀림없이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 대한 누가의 이야기를 요약한 기사로 보인다(눅 24:13-35). 이것은 ‘(그러나 그들이)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 16:13)는 말 외에는 누가의 기사에 아무것도 첨가된 것이 없다. 두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기사는 그것이 다른 전승에 의존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것은 누가의 기사에 의존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는 마리아의 보고를 믿지 않는 두 사람들(제자들)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누가는 두 제자는 시골 길을 걸어 엠마오(예루살렘 서쪽)라는 조그만 동네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제자들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여인의 보고와 이 사건에 대한 성경의 예언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완고한 불신에 갇혀 그들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을 놓여 버린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예루살렘 신자들의 교제권과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옆에 걷고 계셨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마 그분이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기에 그들의 이전에 알고 있었던 예수님과 달리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그 길에서 이 두 제자와 말씀을 나누시고 이미 일어난 모든 것이 기록된 성경을 알지 못함을 책망하신 후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자 ‘저희 눈이 밝아졌다’(눅 24:31). 제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자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자신들도 예수님을 보았다고 전했다. 여전히 다른 제자들은 믿기를 거부했다. 아마 그들은 이 사람들이 무언가 환영 같은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는 참으로 다시 살아났을까? 그것은 받아들이기 너무 힘든 사건이었다.
3. 열한 제자를 꾸짖으심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
예수는 또 한 번 나타나셔서 결국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동료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 믿기를 거부해 온 제자들을 만나셨다. 여기서는 또 한 번 누가의 기사(눅 24:36-44)가 간단히 요약되고 있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책망이 특별히 엄하다.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에 대한 그의 어떤 책망들보다도 더 엄하다. 여기서 사용된 두 단어 즉, avpisti,a(아피스티아, 불신앙, 불충성)와 sklhrokardi,a(스클레로카르디아, 믿기를 거절하는 완고한 마음, 둔함)은 예수가 전에는 그의 제자들에게 사용한 적이 없는 단어들이다. 이 제자들의 완악한 마음은 마가복음 6:52과 8:17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불신앙과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못했다(16:14).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다. 예수께서 자신이 죽을 거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자신이 살아나실 것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구약성경은 예수께 일어난 모든 일을 예언하고 있으며, 그분의 부활도 예언하고 있다. 제자들은 완강하게 믿기를 거절한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그 기쁜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시겠다고 하신 갈릴리로 갔어야 했다(막 14:28). 하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고, 예수는 거기서 그들을 만나셔야 했던 것이다.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축사하여 떡 일곱 광주리 남은 사건 이후: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막 8:17)
4. 듣고도 믿는 사람이 되라
오늘 주제 본문에서 동일하게 반복 되는 내용은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16:11)와 ‘(그러나 그들이)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 16:13)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듣고도, 심지어는 보고도 믿지 못하였다. 이미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누차 말씀하셨기 때문에 마땅히 믿고도 남아야 하는데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과 믿음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불신의 현상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보고 믿는 자입니까? 보지 않고도 듣고도 믿는 자입니까? 일점일획도 가감 없이 예언하신대로 반드시 성취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제부터는 듣고도 온전히 믿는 주인공이 됩시다. 믿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다!
▶ 내가 이해 안되어도 들은 그대로 믿으라!
▶ 막달라 마리아처럼 순종과 헌신의 사람이 되라!
▶ 제자들처럼 마음의 ‘불신앙’, ‘믿기를 거절하는 완고한 마음’을 버리라!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0-10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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