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1 > 특집 > 이슈추적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4월19일 제606호 통합검색 기사검색
국기경례 거부, 승소 판결도 있다
1975년 대법원이 “국가 모욕할 목적 없다”며 제천 남천교회 목사 손 들어줘…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승인한 교회들은 유신정권의 ‘국가 종교’에도 침묵
▣ 제천=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1973년 6월 인구 7만 명의 제천읍(현 제천시)에 ‘국기 애국주의’ 열풍이 휘몰아쳤다. 1972년 ‘국기에 대한 맹세’가 제정된 이듬해 국기 교육은 한층 강화되고 있었다. 당시 제천 대제중학교를 다녔던 김동길(45·가명)씨는 “매 수업시간 시작 때마다 반장의 구령 아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고, 등교하면서 운동장에 걸린 태극기를 보며 경례를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러던 중 교회 목사와 주일학교 반사가 국기 경례 거부를 선동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까지 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 뒤 제천의 모든 학교가 거부자 적발
“동명초등학교였지요. 국기 경례를 거부한 아이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애국조회 때 경례를 하지 않은 아이들을 다그치니까 모두 남천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거예요.”
강태호(61)씨는 당시 남천교회의 주일학교 반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이 강씨를 찾아왔다. 아이들이 강씨에게서 국기 경례를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강씨는 경찰에 끌려갔다. 다음은 백영침(소천·당시 51살) 목사 차례였다.
△ 1973년 제천 국기경례 거부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간 이혜정씨. 그는 “신앙에 따라 국기 경례를 하지 않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보통 사전에 목사님이 주일학교 반사들에게 공과공부를 시키거든요. 백 목사가 반사들에게 국기 경례를 하지 말라고 시켰다고 잡아들인 거지요.”
당시 교회 집사였던 이혜정(82)씨의 증언이다. 어이없게도 백 목사와 강씨는 구속됐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백 목사의 설교 내용을 문제 삼았다. 백 목사가 국기 경례를 하지 말라고 교인들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강태호씨의 경우는 1년 전에 한 말을 끄집어냈다. “1972년 7월 중순 일요일 오전 9시께 주일학교에서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5명의 학생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토록 선동했다”는 것이 강씨의 범법 행위였다.
백 목사와 강씨는 검찰 조사에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국가를 사랑한다. 단지 인격체가 아닌 대상에 절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계속 ‘국기·국가를 모욕할 목적’이었음을 실토하라고 종용했다. 이들은 “국기 경례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기는 행위”라고 말했지만, 검찰에겐 반국가사범의 변명으로밖엔 들리지 않았다.
다른 교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제천에서 두 번째로 큰 교회의 목사가 구속됐으나, 모두 이를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지연구(50)씨는 “되레 다른 교단에선 남천교회가 국기에 경례를 하지 않는다며 이상하게 취급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남천교회 사건의 여파는 제천 전역으로 퍼졌다. 유신체제의 군기잡기에 제천의 모든 학교가 국기 경례 거부자를 적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중·고를 가리지 않고, 교사들은 회초리를 들고 조회대에 섰다.
“목사님 몸이 피멍으로 얼룩졌어요”
김동길씨에게도 1973년은 끔찍한 한 해였다.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그 또한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던 동생이 이미 끌려와 무릎을 꿇고 있더군요. 형사들이 누가 시켰냐며 계속 캐묻는 거예요. 끝까지 내 스스로 판단해서 그렇게 했다고 우겼지요.”
김씨는 그 뒤 자퇴를 선택했다. 교장 선생님이 불러 “학교에서 너를 보호해주긴 힘들다. 학교 다닐 때만 국기 경례를 하고 사회에 나가서 안 하면 되지 않느냐”고 설득했지만, 그는 매일매일 양심의 시험대에 서느니 다른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의 법과 국가의 법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여름방학을 보내고 자퇴 서류를 냈지요.”
남천교회 백영침 목사는 8월께 보석으로 풀려났다. 당시 교인들과 함께 철야기도를 하며 백 목사를 위해 기도했던 이혜정씨는 구치소에서 나온 백 목사의 몸이 망가져 있었다고 회상했다.
“두 달 정도 구치소에 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어요. 어찌나 조사를 험하게 받았던지, 목사님 몸이 피멍으로 얼룩졌어요.”
재판은 불구속 상태에서 진행됐다. 이씨는 증인으로 나가 “국기를 모독할 목적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금지한 십계명 때문에 국기 경례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변호인 쪽은 백 목사의 ‘애국심’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국기 경례가 결코 애국심과 등가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변호인 쪽은 백 목사가 1973년 7월10일 주일 예배 설교 뒤 “성경 교리상 경례는 안 되지만, 주목하는 방식으로 경의를 표할 수는 있다”라는 취지로 말한 사실을 제시했다.
△ 당시 사건의 ‘진원지’로 지목됐던 남천교회(왼쪽)와 동명초등학교.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모든 학교에서 경례 거부자를 적발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이 주효했는지 재판은 예상외로 남천교회의 승리로 끝났다. 청주지방법원은 1974년 “피고인이 국기를 비기할 고의나 국기를 모욕할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없다”며 백 목사와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국기를 모욕할 목적이 없다면, 형사처벌할 수 없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검찰은 즉각 항고했으나 그해 5월28일 고등법원도 원심을 유지했다. 대법원도 같은 견해를 고수했다. 남천교회의 완전한 승리였던 것이다. 매우 상식적인 판단이었지만, 이 사건과 흡사한 광양 진월중앙초등학교 국기 경례 거부 사건 판례를 뒤집은 작은 혁명이었다(상자기사 참조).
정치적이기보다는 신앙과 양심에 충실
서슬 퍼런 유신 시절 국가 종교와의 싸움에서 작은 승리를 일군 남천교회는 소수교단인 총공회 소속이다. 총공회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신파에서 분리됐다. 여태까지 국기 경례를 거부하고 있는 교회들의 상당수는 고신파를 비롯해 재건파, 총공회 소속이다. 반면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리낌 없이 행했던 여타 교단들은 국가 종교화된 유신정권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으며 국기 경례를 거부하는 동료 기독교인들이 핍박받을 때도 침묵했다. 기독교인인 김두식 경북대 교수(법학)는 <기독교사상> 2월호에서 “일제시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며 남산 신사에 올라가 고개를 숙였던 보수 교단은 그 부끄러운 역사는 슬쩍 감춘 채, 당시 신사참배에 거부한 소수 기독교인의 후예임을 자처한다”고 꼬집었다.
기독교와 국가주의는 근본적으로 화친할 수 없는 존재다. 절대자를 믿는 기독교의 신앙은 신보다 절대화된 국가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순교했던 기독교인들은 같은 이유로 국기 경례를 거부하고 있다. 이영인 목사(총공회)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국기 경례 거부는 정치적이었기보다는 자신의 신앙과 양심에 충실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5-01 2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