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 목사] 세상을 어떻게 살고 갈까?

2009.05.08 20:04

윤봉원 조회 수:859 추천:64

날자: 2009년 5월 7일 목후
강사: 김영웅 목사

제목: 세상을 어떻게 살고 갈까?
본문: 베드로후서 3장 7절 -13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세상을 어떻게 살고 갈까? 우리는 세상을 그저 열심히 살려고만 하고 달려 왔습니다. 세상이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한바 되었다. 온갖 건설들이 우뚝 우뚝 뽐내고 자랑하고 있지만 풀어진다. 첨단의 과학이 우주선을 만들어 놓아도 불탄다. 체질이 무너진다. 빼앗기는 날, 도적 맞는 날이 있는 세상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불사를 것은 보존을 하느냐? 보존 이유는 경건과 불경언 구원과 멸망의 그릇이 차기까지 보전된 것이라. 아 이것은 경건이다. 불경건이다. 구원이다, 멸망이다. 이것이 드러나서 멸망시켜도 지당합니다. 왜 그럽니까?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뚜렷이 구별이 되도록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그릇이 차서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전하여 주신 것이더라.
이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있는 이 면을 보니까 천년이 하루 같아. 아, 벌써 멸망이 닥쳤구나, 벌써 불사를 날이 왔구나, 언제 이렇게 천년이 지나갔나? 주님의 멸망치 않고 구원하기를 원하는 주님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천년이 하루 같다. 하루가 천년 같다. 경건한 사람이든지 이 모든 불경건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붙어 살려고 하니 고생이 많습니다. 애로가 많습니다. 그 면을 볼 때는 하루가 천년 같다. 이런 세상을 사는 나는 이런 세상을 살고 있는 나는 지금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불경건을 어서 속히 벗어버리고 경건을 마련해서 경건한 사람이 되어서 구원함에 이르는 여기에 세상을 이용하고 사용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멸망을 벗고 구원을 마련하는 거기에 세상을 사용을 하십시오. 불타는 그날이 있습니다. 도적 맞는 그날이 있습니다. 덧에 걸리는 그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날이 주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리하여 그날에 점도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에 나타나기를 힘써라.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이 이런 세상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고 어떻게 살고 갈 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세상에서 산다고 세상 것을 소망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날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날, 재림의 날, 하나님의 날, 이 날은 불타는 날, 별세의 날, 재림의 날, 부활의 날,심판의 날, 우리의 행한대로 갚음을 받아서 영원히 살게 될 그날을 우리가  소망하라. 다시 말하면 그날에 어떻게 되어질 것을 생각을 해라. 계산을 해라,. 그날을 바라보고 그 날에 가서 무엇이 가치 있다고 드러날 것이며, 무엇이 크다고 드러날 것이냐? 그것을 생각하고 오늘에 살아라. 그날에 무엇이 큰 것이며 무엇이 작은 것이며, 실력이며, 존귀해 지고 천해지는가 그날의 것을 우리가 계산해 가지고 살아라. 그리고 간절히 사모하라. 집중하라 깨어 있으라 정신을 차리라. 그날에 점도 없이 흠도 없이 나타날 수 있는 거기에 집중하라. 근신하라. 정신을 차리라. 일사각오를 해라. 정신일도다.
이렇게 그날에 모든 것이 풀어지는데 드러나는 것이 있다. 땅위에 산 언행심사의 행위가 드러난다. 모든 것은 풀어지는데 땅위에 산 언행심사는 드러나게 된다. 그 중에 가장 가치있게 드러나는 것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이다.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본문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거룩과 경건에 집중을 하여 그날에 점도 없이 흠도 없이 나타나도록 소망을 두고 집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행실이 무엇이며 경건이 무엇인가? 거룩이라는 것은 세상에서도 많이 말을 합니다. 종교마다 씁니다. 도덕에서도 씁니다. 사훈으로도 쓰고, 가훈으로 씁니다. 크고 작은 단체들이 다 거룩이라는 것을 쓰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거룩은 보다 더 선하게 착하게 의롭게 한 것을 가려서 하도록 하자. 누구보다 공자는 성현이다. 거룩이다. 석가는 이런 저런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보다 석가는 성현이다. 그것이 거룩이 그렇게 가려 낸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거룩의 정의가 이것으로 묻혀 버렸습니다. 이래서 오늘 세상적인 거룩이 기독교 안에도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어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거룩이라는 것은 지저분한 것도 많은데, 사이비한 것도 많은데 이것이 틀렸다. 맞다. 옳다 틀렸다. 옳은 하나에 도달하는 것, 옳은 것은 하나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하는 것인데 구별하면 하나입니다.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말도 맞고 인본.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아니면 아니고 기면 기지, 옳은 것은 하나지. 이것을 구별하는 하나인 깨끗을 구별하는 과정을 구별이라. 그 하나에 도달했을 때 진실이라. 진실은 여기에 도달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옳은 것이다. 요 지식하고 인정하고 옳은 것이라고 깨달음과 행위를 할 때에 거룩한 행실이라 말을 합니다. 기독자의 거룩의 표준은 시발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자존하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완전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자존할 때 거룩한 하나님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있고 난 다음에 이 존재보다 더 크고 완전하다 옳다 참되다 여기서 나타나게 됩니다.
원인 없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와 같이 있을 때에 이 원인으로 생겨진 존재와 원인 없이 자존한 존재가 구별이 되어서 이 존재와 같은 것이 아니고 다르다. 이는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거룩은 시발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독교의 거룩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지고 구별을 해야 합니다. 구별하면 뭘 구별해야 하느냐 지음 받아 존재한 것도 있고 원인이 없이 존재한 자존의 존재가 있습니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기독교의 거룩입니다.
세상의 거룩은 이 자존의 존재는 무시합니다. 원인이 있어 존재한 이것을 가지고 키가 크다. 작은 것이다 피조물 가지고 구별하는 것이다. 거게 무슨 옳은 것이 있습니까? 도덕 지키나 안지키나 지옥 가는 것입니다. 그게 거룩이 없어. 이 거룩이 교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구별하려고 야단을 지깁니다. 세상 거룩입니다. 거기에 옳은 것이 없습니다. 깨끗이 없습니다. 하나입니다. 스스로 자존한 그분만이 우리는 옳은 것이고 깨끗한 것이고 완전한 것이고, 그분으로 인하여 존재한 것과 원인 없이 존재한 그분이 다르다. 모든 착함도 다르고 깨끗함도 다르다. 그분이 정말로 깨끗한 분이다. 의로운 분이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신다.  이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늘 자존자를 모르고 원인이 있어 존재한 거기에 대해서 저절로 되었다. 어디에서 떨어져 나와서 유출이 되었다. 별별 종류의 것이 있다고 구별해 아는 것은 거룩이 아닙니다. 세상에 존재의 사이비한 것이 가득찼습니다. 헤치고 헤쳐서 자존자가 계신다. 이 분이 원인이 되어서 모든 피조물이라는 존재가 생겨졌다. 원인 없이 자존하신 그분이 깨끗하신 분이다. 온전하신 분이시다. 착하신 분이시고 선하신 분이시다. 이래서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것은 스스로 자존하여 계신 이 분에게 속하여 따라 붙어야 산다. 산다. 요것을 구별하는 것이 기독교의 거룩입니다.
사람 속도 모르는 것을 보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거룩이라 할 수 있습니까? 우리 기독교의 거룩은 이것이입니다. 존재가 있다. 원인이 있어 존재한 것과 원인 없이 존재한 이 분은 다르다. 위대하다. 이것을 구별해 내는 것이 기독교의 거룩이다. 이것 때문에 사이비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룩한 행실. 이것은 어린이도 해요. 제가 세상 것을 아무리 배워도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거룩을 모르는 자입니다. 낫놓고 기억자를 몰라도 이것을 가지면 거룩을 가진 자입니다.

스스로 자존한 그분에게 붙어야 산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기독자의 거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못할 것 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 지식 가지고 구별하면 됩니다. 이 분에게 붙으면 살고 이 분에게 떨어지면 죽음이다. 떨어지면 죽고 어느 정도 도덕적인 양심이라는 것이 살아 있느냐? 전적 무지요 무능이다. 그게 떨어진 것은 전부 사망이다. 전적 무능이요 타락이다. 칼빈의 오대 교리 가운데 있잖아요. 이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스스로 존재한 그분을 떠나서 죽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성도의 거룩이라는 것은 전적 무지 무능 부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만 타락한 인간이 살 수 있다. 이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돈 벌어가지고 못 삽니다. 불탑니다. 덧이 걸립니다. 원인 없이 떨어진 그것이 전적 붙어서 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만 타락한 인간이 살게 된다. 영 죽었던 자들이 살 수 있다. 중생되어 졌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성도의 거룩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대속으로 살려 주신 이 대속의 구원과 나를 피조물이 대신한 대속과 다르다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성도의 거룩이다. 아무리 부모가 형제가 나를 대신 해 준다 해도 영원히 죽었던 자가 중생이 안됩니다. 이것이 다르다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대신 해 준 것과 피조물이 나를 대신 한 것이 다르다. 원인 없이 자존한 그분이 나를 대신 해 준 것만 완전한 것이고 불변한 것이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성도의 거룩이다.
중생된 자들에게는 이런 구원을 얻었다. 이것을 알게 한 것은 바요나 시몬아 이를 알게 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게 해 줬다. 이것을 알게 해 준 것은 성령의 지혜와 총명이다. 중생된 자들에게 이런 구원을 주셨다.
기본구원이 오늘 세상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 참되다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예택 구원 예정 구원 창조 구원 중생 구원 천국 시민의 구원 성령과 진리, 피의 보증 구원,,,,영화의 구원이 다르다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거룩이 다른 것입니다.
절의 행사에 목사가 축사를 하고 교회의 행사에 중이 와서 축사를 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날에는 이 거룩을 가지고 경건을 이루게 되어진 것은 그날에는 평강 가운데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소용 없습니다. 슬피 울며 이를갊이 있으리라. 산아 무너지라. 이를 덮으라. 나를 가리워 달라. 땅위에 사는 동안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것을 우리가 구별을 하고 이제 우리는 기본구원을 바탕삼아서 우리는 하늘나라에 이 영광스러운 건설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날에 부끄러움이 없는 건설의 구원을 영광스러운 구원을 높이 들려 질 수 있는 구원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을 구별 해 내야 합니다.
경건
이래서 이것을 구별해서 어디에 붙어야 하느냐? 원인 없이 자존하신 그분에게 붙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에 신랑과 더불어 결혼을 한 것입니다. 경건은 원인 없이 자존하신 그분에게 들어 붙는 것이요 그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만 보여지면 경건입니다.  이 경건이 거룩한 행실로 됩니다.
찬송가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거룩한 행실이 있어야 들어 붙습니다. 땅위에 사이비한 것은 이분에게 갖다 들어 붙으면 됩니다.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느냐?
몸에 구속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벗지 않고 사는 것을 됩니다. 건강을 위해서 등산보다 이것이 자기 몸을 위한 것인줄 알고 먼저 구별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대속을 주신 이것 우리가 입고 벗지 않고 어떤 현실에서든지 살게 되면 어디든 주를 위하여 영감으로 살고 대속을 입은 자로 살게 되면,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하여 주를 위하여 살면 -죽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습니다. 아무리 등산 해도 썩지 않을 것으로 덧입지 못합니다. 낫고 천한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존귀해 집니다. 마귀가 침범치 못합니다. 죄로 인한 형벌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지는 이것을 준비 해 가지고 하나님의 날이 임하는 그날에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가지고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날 수 있으니.
세상을 어떻게 살고 갈까? 주의 재림의 날, 도적 맞는날, 덧에 걸리는 우리의 행위가 드러나 영원히 갚음을 받는 그날에 새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도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오늘에 기독자입니다.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5-1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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