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소망

2009.04.01 16:48

윤봉원 조회 수:1001 추천:50

빌 1:20-262009040133날자: 2009년 4월 1일 수밤
제목: 바울의 소망과 기대
본문: 빌립보서 1장 20절 – 26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1. 구별하며 사는 것이 본능화 되어야!!
우리는 삶의 동기가 하늘의 것과 땅의 것 두 가지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도 하나님과 세상(마귀) 둘이라는 것, 육신적인 방편과 영적인 방편, 땅의 소망과 하늘의 소망, 썩어질 것과 썩지 않을 것, 영원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성공과 실패, 잠시 고난 후에 영원한 영광이 마련되어 있는 것과 잠시 기쁜 것과 영원한 부끄러움의 결과를 맺는 것 등 두 가지가 우리의 현실에 항상 놓여 있음을 기억하고 성경을 근거하여 항상 구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본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7-18)
2. 사도 바울 소망
2.1. 그리스도가 존귀해 지는 것
바울은 20절에서 자신의 소망과 기대를 드러냈습니다. ‘간절한 기대’는 사람이 앞에 있는 것을 보려고 목을 빼고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로마서 8:19에서 바울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소망과 기대가 함께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최종 성취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기를 바랐고 기대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염려하지 않고 다만 복음을 제시할 용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담대하다’(sufficent courage)는 충분한 용기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에 솔직하고 대담하기를 원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무죄로 석방되어 나온다면 사도직을 계속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사형이 선고된다면 그는 확고한 신앙과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가지고 주님께 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생사의 주권은 주님께 맡기고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는 말입니다.
‘존귀하게 하다’(20)는 말은 지위를 높이는 것, 존경과 명예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리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해지도록 자신의 담대함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증언이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의 효과를 증대시키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떤 사건, 어디서든지 주저하지 아니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서슴지 아니하고, 삶에 속한 것이나 죽음에 속한 일이나 어떤 일이든지 그리스도만 존귀해지는데 초점을 맞추고 살았던 것입니다.
21절의 ‘내게’는 바울의 확고한 결심과 흔들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하면서 현재 시제를 사용함으로 삶의 과정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존귀해지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참조 찬송가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바울에게 삶의 본질은 그리스도였으며, 또 그분과 살아 있는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 표현을 통하여 바울은 내주(內住)하시는 그리스도보(참조. 골 1:27; 갈 2:20)다는, 삶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행하는데 동기와 목적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이었습니다. 삶에서 바울의 모든 목적은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하는 것과 그분을 닮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죽는 것도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의 소망과 기대의 실현이었습니다(20).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육신적으로 죽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유익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가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23절). 즉, ‘주와 함께 본향’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참조. 고후 5:8).
2.2. 빌립보 성도들의 기쁨과 믿음이 커지는 것
22절에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대” 바울은 만약 판결이 바울에게 유리하게 되어 그가  석방된다면, 그것은 많은 열매를 맺는 수고를 더할 것임을 의미한다. 즉 더 많은 선교 여행, 더 많은 교회 개척, 더 많은 회심자와 동료 신자의 강건케 됨, 그리스도를 섬길 더 많은 기회를 의미합니다(참조. 롬 15:18; 고후 10:11; 빌 2:30). 그것은 틀림없이 행복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사형선고를 받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라고, 이것은 바울 내면의 딜레마를 나타냅니다. 그는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결정권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사랑했으며 그와 함께 거하기를 좋아하므로 죄와 고통을 떠나서 영원토록 그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였습니다(23). 그러나 그는 빌립보 성도를 역시 사랑했으며 그들은 분명히 영적으로 궁핍하였고, 그들 가운데서 더 일하는 것이 아주 좋은 결실을 가져오며 구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느 때든지 죽을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었으며, 천국에 대한 확신으로 실제로 죽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개인의 바람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지상 사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교회들이 성장하고 견고해지도록 도우려면 육신으로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바람보다 동료 성도들의 필요를 우선시 한 고백이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4)고 한 것입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5)
이 구절은 새로운 확신을 밝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 바울은 죽음을 확신했습니다(1:20; 2:17).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실 일이 아직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적어도 이 투옥이 자신의 죽음을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살아서 빌립보로 돌아갈 것이고(몬 1:22절), 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그들 가운데서 일할 것입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진보”는 빌립보 성도들의 기쁨이 더 커지는 것,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강해지고 성장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자기가 석방되면 그들은 한없이 기쁠 것이고(1:26), 그들의 믿음이 틀림없이 강해질 것으로 생각하며 이 말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 1:26)
바울의 귀환은 빌립보 성도들을 북돋울 것입니다. 바울의 안전을 위해 간구한 그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1:19). 이 구절에 사용된 ‘기쁨’(NIV: 자랑-개역개정)은 이 편지에 나타나는 다른 많은 용례와는 다른 것이다. 여기서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크게 기뻐하는 것’, 넘쳐흐르는 기쁨의 기초나 근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안전한 귀환에, 그를 사랑하는 회중은 응답된 기도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대단히 기뻐할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기대는 나중에 성취되었습니다.
2.3. 다니엘
다니엘은 한 달 동안 하나님 섬기는 일을 하지 말라고 금지가 됐습니다. 한 달 동안 금지되는 이 금지가 다리오왕은 그 내용을 모르고 전국민과 대신들이 원하니까 어인을 찍어서 한 달 동안은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 종교를 바라보지 말고 다리오왕만 바라봐라 하는 이 어인을 찍고 다리오왕 외에 다른 자기의 어떤 신에게나 대상에게 소망을 두어 섬기는 자이면 사자굴에 던져 사형을 시킨다는 그 조서가 자기에게도 왔습니다. 이 조서를 받고 하나님 섬기는 일에 조금도 요동이 없이 여전히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그 문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그는 감사했습니다. 그 조서가 하나님을 배반하든지 배반하지 안하면 사자밥이 될 터이니까 모든 벌벌 떨 터인데 죽을 터인데 다니엘은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가 왜 감사했겠습니까? 감사한 그 심령이 무엇인지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만 앞으로 남습니다. 이 요소의 신앙만 남습니다. 그 신앙으로 다니엘은 결과적으로 다리오왕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단 3:29)
3. 바울처럼 생사화복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순종만 하여라!!
하나님께서 창조주요, 주재자요, 주권자요, 영원한 왕이시오, 완전자시오, 영원히 피조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영원히 보존되고 그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 분이 짐승 같고 순전히 마귀화된 우리를 십자가의 대속으로 화친을 맺었고, 지극히 크시고 높으신 그 분이 지극히 천한 우리들로 동거동행하려는 이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심신, 소유 전부가 하나님과 화친 맺은 이대로 세상생활을 끝을 내야 할 우리입니다. 나와 내 모든 것 중의 하나라도 이렇게 지극히 높으신 이와 지극히 낮은 나와 화친을 맺은 이 화친을 배반하는 것이 되지 아니하고, 이 결합을 배반하여 절단하는 것이 되지 아니하고, 화친을 이것을 배반하여 배신 원수되는 일이 되지 아니하고 내게 있는 세포 하나라도, 조그마한 소유라도, 내 한 지체라도, 어느 한 토막의 순간의 움직임이라도 이 화친을 보존하고 결합을 보존해서 화친된 자로 결합된 이 자로 통과해야 하겠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궁세계에 부활할 때에 화친한 내 언행심사로 내 심신으로 내 소유로 결합된 나와 내 소유로 이렇게 세상을 딱 끝을 내서 가 버리면 다시는 시험이 없습니다. 만일 이 일이 성공되지 못하고 실패된다면 이는 영원히 울어도 힘써도 할 수 없는 일이니 주님과 구속하신 내 주 하나님과 화친된 이 화친 내주 하나님과 결합한 이 결합이 끝나기 전에는 안심이 안 됩니다.
이러기에 화친하고 결합된 이것으로서 당신과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아 쓰여서 없어지든지 화친한 하나님과 결합한 주님 때문에 그 때문에 세상에 깨여져서 없어지든지 박살이나 없어지든지 어쨌든지 그분과 결합 그분과 화친 이것으로서 자기와 전 소유가 세상생애를 끝마치기를 원하는 이것이 다니엘의 소원이요. 바울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사자 굴에서도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근심 걱정은 육신의 성과를 목표하고 이것을 달성하려는 이 근심 걱정이나 노력이 성도의 근심과 노력이 아닙니다. 이것은 땅에 속한 노력이요 땅에 속한 근심입니다. 성도의 근심과 노력은 천한 것이 조물주와 만물의 때와 같은 죄인이 하나님과 이렇게 화친, 결합이 됐는데 동거동행의 결합이 됐는데, 내 소유 전부 내 마음 전부 내 몸 전부, 내 생명 전부 내 시간 전부, 내 전부가 세상에 어떤 시련이 오고, 어떤 압박이 오고, 어떤 무력이 오고, 어떤 탄압이 오고, 어떤 고문과 고행이 오고, 어떤 역경을 만날지라도 주와 화친을 팔지 않는 자, 소유와 몸을 다 빼앗길지라도 안일을 다 빼앗길지라도 주님과 결합한 이 결합을 내어 주지 않는 자, 빼앗기지 않는 자 이것으로서 나의 세상생애가 끝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이것이 성도의 소원이요. 성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입니다.
바울의 소망을 통하여 사활대속의 공로로 인생역전된 우리도 바울처럼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고난과 평안의 모든 결정은 하나님께 맡기도록 합시다. 오직 우리 삶의 초점은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내주(內住)하고 계시니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인도를 따라서 순종함으로 이웃에게는 구원의 유익, 주님께는 기쁨과 영광만 되기를 소망하고 살아갑시다. 그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가 맺어진다면 우리의 나그네 인생을 가장 가치있게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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